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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꿀 Jul 05. 2021

호러

저승사자가 나오는 꿈을 꾸다.

첫 직장을 다닌 지 9개월쯤 나는 죽을 운명을 한번 넘겼다. 우리 집은 시골이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어 딸 셋을 키우셨다. 시골집은 차를 타고 조금 나가면, 고속도로를 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 의무기록사로 첫 근무를 시작했다. 병원은 편도로 고속도로를 타서 차로 한 시간 정도, 출퇴근 시간대는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곳이다. 기본 왕복 2시간 이상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병원 기숙사를 생각하지 않았다. 언니들은 결혼을 한 상태였고, 집에는 엄마 아빠 나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할부로 마티즈 경차를 샀다. 막히는 시간대를 피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병원으로 이른 출근을 했다. 아무도 야근을 시키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저녁을 먹고 일을 더 하다가 오후 9시쯤 퇴근을 했다. 엄마에게 특별한 연락이 없으면 그렇게 했다.


병원은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곳이었다. 나는 응급실, 소아과, 산부인과 담당이었다. 당시에는 전자 차트가 아니라 종이 차트였다. 아침에 출근하면 응급실로 가서 전일 응급실 차트를 가져왔다. 완료 차트는 넘기고 미비 기록을 체크해서 기록을 다시 요청하는 작업을 한다. 소아과 · 산부인과 차트도 미비 기록을 체크하고 국제 질병분류 그리고 의료행위분류번호를 부여하는 코딩 업무를 한다. 나는 코딩이 문제가 아니라 의사가 쓴 필기체 의학 용어도 알아보기 벅찬 신입이었다. 그래서 일찍 출근, 더 늦게 퇴근했다. 따라가기 위해서. 나는 내 업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직업은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는 않는다. 병원 통계를 담당하는 주임님도 있지만, 내 일의 대부분은 미비 기록을 체크해서 담당 인턴 레지던트에게 완전한 의무기록을 요청하는 작업을 한다. 병원에서 일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성적이고 이타적이며 프로페셔널하고 멋있고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새하얀 가운을 입고 일을 한다. 병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순간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괴리감이 들었다. 퇴근을 해 집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아빠는 거의 매일을 술이 된 채 욕은 일상이며 큰 난리가 나지 않으면 누군가와 작은 싸움이라도 한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늘 화가 차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종일 농사일을 했다. 온종일 다리를 구부린 채 호미로 풀을 메었다. 밭에 물을 주는 일은 또 어떤가. 경운기를 틀어 호스를 연결해 주어도 무척이나 힘든 일인데, 술이 된 아빠가 하지 않으니, 엄마는 심어 놓은 모종이 죽을까 봐, 혼자서 애가 타서, 양철로 된 큰 물조루에 물을 담아 어깨에 메고 밭을 수도 없이 오가며 물을 주셨다. 엄마는 그걸 나한테 따로 말하지는 않는다. 한집에 살면서 그냥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힘들다' 한탄이 아니라 '그때 내가 물을 안 줬으면 지금 저 배추가 잘 컸겠냐?' 하는 의기양양함이었다. 엄마에게도 분명 좋은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라면 내가 엄마라면 나는 이혼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혼이 안된다면 도망을 가기라도 했었을 것 같다. 엄마의 즐거움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으로 견디었을까? 책임감이었을까?



아주 조용한 새벽 같았다. 안개가 자욱한 낮은 강가에 나룻배 하나가 있었다. 나는 "어 배다!" 하고 그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 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내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까만 옷과 까만 갓을 쓴 사람. 갓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저승사자. 소란스럽게 하면 내 어깨를 탁하고 잡고 놔주지 않을 것 같아서 "아, 나 그냥 이거 안 탈래!" 뭘 모르듯, 명량하게 재빨리 말하고 뛰어내렸다.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깼다. 새벽 5시. 출근을 위해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날도 오후 9시에 퇴근을 했다. 나는 깜깜해진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리고 있었다. '펑' 갑자기 운전석 타이어가 터져버렸다. 차는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핸들이 마구 돌아갔고 중앙선을 침범했다. 마주오는 차는 클락션을 울렸고, 나는 돌아가는 핸들을 겨우 다시 꽉 잡아 원래대로 핸들을 다시 돌렸다. 제 도로로 다시 왔지만 다시 뒤에서 달려오는 차가 클락션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나는 겨우 갓길에 차를 세웠다. 꿈이 하도 선명해서 조심해야지. 조심해야지 했다. 다행히 별일 없이 하루가 다 지나갔다 싶었을 때, 죽다 살아났다. 엄마의 대차고 의기양양한 성격을 물려받은 걸까? 덜덜하면서도 '나 그냥 이거 안 탈래' 지금 생각해봐도 침착히 잘 대처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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