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시절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기침은 없었지만. 아주 짧지만. 아주 날카로운. 아주 기분 나쁜 흉통이 있었고, 이유없이 7kg 이상의 체중감소도 있었다. 나는 진료를 보고 폐결핵 진단 후 6개월 동안 결핵약을 복용해야 했다. 하지만 집은 요양을 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국립 마산병원에 3개월 정도를 입원했다. 병원비는 거의 무료에 가까웠다. 입원 생활은 아침 7시쯤 식사를 하고, 이후 모든 환자들은 넓은 공터에 모여 간단히 체조를 하고, 뒷산에 올라 맑은 아침 공기를 마셨다. 그 이후는 줄곧 자유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고 일찍 잠에 들었다. 모든 입원환자들은 결핵 진단을 받은 환자임으로 친한 소모임 등을 너무 자주 하지 말라는 간호사의 당부도 있었다.
결핵약을 먹으면 침대 밑바닥으로 온몸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힘이 빠진다' 그런 느낌과는 아주 다르다. 나는 죽는 순간이 이런 느낌일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입원을 하니 아주 많은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아주 여유로웠지만 아주 외로웠다. 나는 간호사의 당부를 잊지 않고, 같은 병실을 쓰는 다른 환자들과도 아주 짧은 대화만 나눴다. 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따뜻한 전화를 두 언니들로부터 받지 못했다. 언니들은 결혼 후 직장과 육아로 바빴다. 그래도 한 번쯤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약은 잘 챙겨 먹는지. 입원한 병원은 지내기 괜찮은 곳인지' 물어오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어쩌면 한 번쯤은 있었을 수도 있겠다. 기억의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두 언니들에게 받은 마음은 '결혼 이후에도 아빠 때문에 힘든데, 너까지 보탠다' 는 것 이었다. 나는 당시 학생이었고, 남자 친구는 사귄 적도 없었으며, 약 복용 후 2주면 전염성이 없어지지만 결핵이라고 하면 뜨악하던 시대였다. 안전히 편안하게 집에서 요양을 할 수 있는 가정환경도 되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들이라고는 두 언니들 뿐이었다. 언니들에게 마음적으로나마 의지하고 싶었다. 그건 내 욕심이었을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 욕심이었을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 이건 나의 일이다.
병원은 집과 멀다 보니 엄마는 아침부터 집을 나서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병원을 찾아왔다. 멀어서 자주 찾아오진 못했다. 오셔도 오래 있지 못했다. 짧은 면회시간에도 아빠는 술이 되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엄마는 그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엄마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픈 나보다 더 힘들고 슬프고 외로웠을 것 같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눈물을 훔치셨을 것만 같다. '약만 잘 먹으면 된다. 폐결핵 앓고 지나 간 사람들 많다. 병을 잘 이겨내야 한다. 엄마한테 짐 하나 더하지 말고, 완치해서 꼭 취직해서 엄마 고생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자' 그렇게 다짐했다. 그런데도 어는 순간 자존감이 바닥을 쳐 너무나 우울해질 때가 자주 있었다. 그때 아프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런 기억을 만들어서 미안해 엄마.
지금의 남편은 내가 예전에 폐결핵 진단을 받고 나은 걸 알고 있다. 별 다른 말없이 '많이 아팠었네' 하고 말해주어서 고마웠다. 폐결핵과 담도암처럼지독한 병은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 같다. 엄마가 아빠보다 먼저 돌아가신 건, 그 이유 밖에 없을 듯 하다. 세상은 힘든 사람한테 힘든 일이, 슬픈 사람한테 슬픈 일이 자꾸 보태어지는 것 같아 참 애달프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사주에서 하는 이야기처럼 운이 바뀌듯 아니면 그 크고 작은 불행들을 묵묵히 잘 겯디어 내어서 그런걸까. 마흔을 넘긴 지금의 나는 이전에 많이 불행해봐서 그런지 사소한 것에도 '행복하다' 고 자주 느낀다. 사랑하는 남편과 내 아이를 만나기 전 내 삶의 전부였던 엄마를 보낸 슬픔은 여전하지만 실제로도 지금의 나는 비교적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나는 이제 힘들었던 과거를 보상받듯 이렇게 남들 못지않게 잘 사는데, 엄마의 보상은 무엇일까? 무엇 하나라도 받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주고만 가신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