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어떻게 더 완벽해, 다시 마주하기 힘든 행운이야. 세상을 가져보니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 볼까.”
이런 순간이 싫다. 만나기 전 이 주간의 설렘과 현재의 행복을 매듭으로 묶어 상자 속에 보관해두어야 할 순간.
거리의 나뭇가지들은 소매의 잎을 하나둘씩 떨구고 있었기에 그 사이로 앙상한 팔다리가 살짝씩 드러났다.
“금방 겨울일 텐데, 쟤네 춥겠다. 부러지는 거 아니야?”
“설국열차 같네. 너 추울 것 같아.”
“그러게 낮에는 괜찮았는데, 밤 되니까 너무 춥다. 옷 하나를 가지고 다녀야겠어.”
4호선의 남태령 방향으로, 그는 이수 방향으로 가야 해서 반대 방향이다.
“오빠, 오늘 오빠 집에서 자면 안 돼? 안산까지 혼자 가기 싫어. 쓸쓸해. 오빠도 알잖아, 가족이랑 떨어져 혼자 사는 기분.”
“… 많이 늘었네.” 그는 잠깐 웃었다. “이번엔 또 무슨 소설을 읽고 이러는 건지”
지난 4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부 알아버린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안 돼. 집 엉망이야. 지금 사람 들일 꼴 아니야.”
“나는 어질러진 방이 더 좋아. 내 방 같아서.”
지하철 문이 열렸다.
나는 집이 있는 쪽이 아닌, 그 반대편 열차로 몸을 밀어 넣었다.
“진짜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괜찮아. 어차피 그 근처에 잘 데 많아.
난 그냥 혼자 지하철 타기 싫었을 뿐이야.”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엔 밝을 때 지하철 타고 갈 거야.”
일 년 전, 사당역에서 그를 그냥 보내고 혼자 돌아섰던 걸
나는 아직도 가장 후회한다.
그래서 이번엔 같은 실수만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은 어차피 실수를 피할 수 없는 종이니까.
그러니 최소한, 같은 실수만은 하지 말자.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철칙이었다.
“그냥 오빠 동네까지 따라갈래. 거기서 방 하나 잡고 잘 거야.
오늘은 내가 자고 싶은 데서 잘래.”
꿈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 나는 몽유병이 있었다.
지금도 딱 그 기분이다.
꿈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무의식처럼 반복하는 느낌.
그런데 그는 늘 나를 꿈꾸게 만들었다.
진짜로 존재하는 게 맞나?
아니면 내가 만든 허상인가?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7년 동안 내가 키워온, 나를 간신히 살게 해 준 허상.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이데아 같은 것.
결국 내 삶은 그 허상을 붙잡으며 연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사당에서 1시간쯤 지하철을 타다가 내렸다.
“안녕, 나는 주변에 잘 곳 예약할게.”
“담에 또 보자, 내일 잘 들어가고.”
“진짜 가게?”
“…”
“나 춥고 외로워서 죽을지도 몰라 이렇게 가면”
“그러게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거리에 주저앉아 팔 안에 머리를 숨기고 눈을 감았다.
그는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러면 차라리 늦게까지 여는 술집을 가자.”
나는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고 앞에 십 미터 정도 앞에 있는 술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술 냄새 토할 것 같아. 아 근데 나 너무 서운해. 집 어질러 놓은 거 진짜 괜찮고, 나는 진짜 바닥에서 자도 되는데, 이렇게까지 안 내켜하는 게…” 나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고개를 무릎으로 파묻었다. “장발장을 들인 교회신부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만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게 어때. 빵까지는 안 줘도 돼. 숙박비도 낼게.”
“일단 일어나 봐”그리고 나는 그의 집까지 걸어갔다.
번호키를 누르고 들어갔다. 그의 방은 내 방에 비하면 깨끗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매트리스 위에서 자라고 했고, 그의 박스 티셔츠와 반바지를 주었다. 나는 티셔츠를 입고 아래에는 원래 하는 대로 속옷만 입고 자겠다고 했다.
“오빠는 어디서 자?”
“나는 여기 담요 깔고 잘 거야.”
“아니 내가 뭐라도 할까 봐? 그냥 여기서 자. 등 돌리고 잘 거니까. 그냥 말 그대로 사람이 필요해서 그런 거야. 오빠를 해치지 않아.”
7년 전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현수를 좋아했던 것은 맞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고백을 한 것도 맞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에 다른 남자들을 만났고, 그 당시에는 그들을 좋아했던 것도 맞다. 그러니 이 감정은 정말로 그와의 정 같은 것의 문제지, 내가 다른 셈법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건 나 자신에게도 맹세한다.
어쨌든 중요한 건 오늘 밤은 혼자 자지 않았고, 우리는 그다음 날 아침까지 등을 돌리고 잤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일이 년에 한 번씩 만났고, 항상 이런 식으로 나는 그에게 신세를 졌다. 우연하게도 그와 나는 둘 다 그 시기에 애인이 없었고, 그는 절대 나에게 이성적 감정을 품지 않는 듯보였다.
그래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의 우울증을 앓는 원인 중 가장 큰 이유가 이별이라고 한다.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과의 단절. 굳이 그렇게 냉정하게 쳐낼 필요가 있나 싶다. 길어도 백 년 남짓 살아갈 텐데, 그 안에서 서로에게 다정하면 어떨까. 얇은 실을 날카로운 가위로 잘라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가끔 서글픈 기분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1000m 풀수영을 하거나 밴드부 연습을 하거나 단편영화 모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스쿠버다이빙 수영장 바닥으로 서서히 침잠하는 기분을 떨쳐내려 하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매일 지겨울 정도로 비슷한 일상을 살면서, 밀양이나 드라이브 마이카와 같은 영화나 소설을 볼 때마다 과거를 곱씹으면서, 맛없는 풀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배부르지도 않을 빈약한 추억을 붙들고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다, 시기가 맞으면 그 서글픈 기분을 잊고 다시 그에게 연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가끔 분홍색 달이나, 오로라 같은 걸 볼 수 있다. 때마침 심심하다면, 귀찮지 않으면, 기꺼이 옷을 주섬주섬 입고, 까만 밤하늘에 수 놓인 별이 있는 어둠 사이로 환한 미소를 띤 채 걸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