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NS BEACH CLUB
<lust for life>
삶은 바다, 그게 아니면 화산 같다.
파도는 발끝을 간질이고, 발목을 감싸다가 갑자기 허리까지 찬다. 바다는 고요하지만 순식간에 화산처럼 변할 줄 안다.
7월 22일, 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운동을 하러 헬스장에 간 건, 몸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공허감을 채우려는 이유였다. 어깨 운동을 하다 원래 5kg 덤벨 대신 8kg을 들었다. 울분 때문인가. 운동을 마치고 나가니 비가 쏟아졌고, 검정치마의 antifreeze를 들었다. 인스타그램은 나와 세상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스토리에 젖은 도로 사진과 듣는 노래, 인바디 결과를 올렸다.
스토리 답장이 왔다.
작년 런크루 MT에서 알게 된 사람, 약속 직전에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취소했던 그였다.
저 이제 동인천 갈 수 있어요.
왜 이제 갈 수 있어요?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한 3, 4주 됐어요
오뎅바, 소주, 치킨과 맥주, 택시. 그 후 며칠 간의 연락이 파도처럼 오고 갔다. 잠깐 스쳤다가, 바람이 거셀 때는 조금 더 해안가 쪽으로 들어왔다, 이내 잦아들었다. 당장이라도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은 그는 옆에 있는 나를 부표인양 다급하게 잡는 것 같았다.
드디어 맞이한 여름방학. 8월의 첫날, 금요일, 친구 한 명과 함께 인도네시아 발리로 떠났다. 사누르, 우붓, 짱구 세 지역을 갔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내 마음도 조금씩 열렸다. 도시의 획일적인 회색 빛 속에서 꽁꽁 얼어있던 감정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여행 지역 짱구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푼 후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파스텔톤 비키니를 입고 발리에서 가장 핫한 비치클럽을 갔다. 계단 아래 바다, 위에는 클럽. 해가 지기 전 바다로 나가 포즈를 취하며 신나게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또래로 보이는 남자 5명 무리 중 한 명이 와서 자기들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저희도 찍어줄 수 있으세요?”
“어? 한국인이세요?”
“ 와~ 모델이 이쁘다~~~”
그들의 천연덕스러운 말 덕분에 더 과감한 포즈를 취하며 즐겁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둑해질 무렵 해변과 연결된 계단을 통해 비치클럽 내부로 들어왔다. 무대 위에서 피부가 까만 여자가 검정 오프숄더 가죽 원피스를 입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고, 아래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방방 뛰며 소리를 지르며 놀고 있었다. 그곳이 비치클럽 안에서 가장 열기가 뜨거운 듯했다. 친구가 말했다.
“저 사람들 우리 바다에서 봤던 사람들 아니야?”
바로 옆에 사진을 찍어줬던 한국인 애들이 있었고, 곧 서로를 알아봤다. 그중 한 남자애가 바로 옆에서 춤을 추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 더워요? 존나 더워요!!!”
“존나 더워!!!!”
그렇게 우리는 친해졌다.
춤을 추는 와중에 외국 언니 둘이서 키스를 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남자(나중에 또 마주쳤을 때 물어봐서 알게 됐다)까지 합세해서 한국인 친구들과 놀았다. 그는 등을 뒤로 구부리며 림보를 하는 것처럼 춤을 추다가 넘어질 때쯤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잡아주었다. 나에게도 권유하는 눈짓을 하길래 춤을 추며 뒤로 등을 구부렸고 넘어질 때쯤 사람들이 환호하며 잡아줬다. 이 분위기를 담기 위해 셀프동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아까 봤던(것으로 추정되는) 외국 언니가 내 입술에 뽀뽀를 하려고 했다. 다행히 입술은 사수했다. 그리고 오른쪽 앞에 있는 한 남자를 봤다.
귀공자처럼 생긴 서양인. 키가 크고 하얗고 다부진 몸매. 아름다웠다.
이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살면서 본 적이 없는데.
내 심장은 마치 화산이 분출하기 직전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클럽의 큰 노랫소리까지 합쳐져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말 한마디 건네기도 전에 그가 이미 내 안의 마그마를 끌어올린 것을 느꼈다.
“저기 오른쪽 앞에 완전 잘생겼다.” 친구에게 속보로 알렸다.
“헐 그렇네”
방금까지 신나게 함께 놀던 사람들과 했던 것처럼 그에게 춤으로 접선을 시도했다. 그는 수줍은 듯 마지못해 몸을 둠칫둠칫 움직였고 잠시 후 왼쪽으로 빠졌다. 민망하기도 하고, 몸을 식히고 싶기도 해서 잠시 그곳을 빠져나와 바로 옆에 있는 풀장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바다로 나갈 때 찍혔던 손도장을 본 안전요원이 모래가 묻었으니 신발을 락커에 두고 오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옷에도 모래가 조금 묻어 있기도 해서 샤워장에서 씻고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 그 잘생긴 외국남자애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나 아까 그 외국인 인스타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한 시가 급한데 샤워실 문은 단 두 칸. 샤워실에 들어간 인도여자애는 샴푸, 린스, 바디워시를 다 하는 건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바로 뒤에 선 키가 큰 스페인 언니가 기다리다 지쳐 문을 두드렸다.
“우리 이러는 동안 가면 어떡해?”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풀장 들어가지 말고 폰만 챙겨서 나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친구는 샤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서 인도 여자애가 나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체감상 1분 내로 모래만 씻고 나와서 그가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여기 한 바퀴 돌면서 찾아보자.” 바다 근처 선베드를 가봤다. 없다. 레스토랑을 둘러봤다. 없다.
그렇게 포기하려던 순간 친구가 말했다.
“쟤네 아니야?”
한국인 남자애들을 만났다.
그 애들은 부산에서 왔고 21살이라고 했다. 나도 같은 경상도, 대구에서 왔다고 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는 26살이라고 했다.
“가시나는 다 친구지 뭐”
“머스마는 다 친구지 뭐”
그때 친구의 시선을 따라가니 부산 남자애들 선베드 바로 옆에 그 잘생긴 외국인 남자애가 있었다.
부산 애랑 외국인 애가 같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어, 둘은 어떻게 알아요?”
“저희는 처음 왔을 때부터 친해졌어요.”
아까부터 계속 앞에 왔다 갔다, 말을 걸어말아 고민하며 주변을 맴도는 모습을 그들에게 들켜버린 듯했다. 나 꽤나 능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해.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가자. 정식으로 인사를 해야지.
“Hello”
그 남자애는 21살이고, 호주 멜버른에 살며,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older brother(형)이라고 했다.
“you are younger brother?(그럼 네가 동생이야?)” 나는 들떠 신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handsome(잘생겼어요)”만 반복했다. 패를 다 보여주다 못해 엎어버린 기분이었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그의 older brother이 나에게 귀여운 한국어 발음으로 ‘예뻐요’라고 했다. 스몰토크도 생략하고 21살 호주 남자애에게 곧바로 인스타 아이디를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간절함이 통했는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인스타 아이디를 입력해 주었다. 인스타 아이디를 받은 후 헤어지기는 싫었고, 내 머릿속은 영어 문장이 아니라 백색소음만 가득했다. 심장은 고막까지 차오른 듯 쿵쿵거렸고,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뇌는 대화를 포기했다. 내가 알고 있는 머릿속의 수많은 영어 단어들은 모래사장 위 발자국처럼 파도에 씻겨 사라졌다. 그를 본 순간 내 혀는 젖은 모래처럼 무거워졌고,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문장이 바닷물 속 해초처럼 흔들렸지만, 그 어떤 것도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절박한 순간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뇌를 거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이 문장이었다.
“Can you take the picture together?”
셀카를 찍을지 친구에게 찍어달라고 할지 판단하는 시간은 단 0.1초였다. 나는 친구에게 폰을 건네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고 그가 앉아있는 선베드의 오른쪽에 앉았다. 그는 내 목 뒤로 오른쪽 팔을 넣고, 왼쪽 팔을 올려 나의 오른쪽 어깨를 감싸 나를 그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게중심의 변화에 따라 나는 오른팔을 그의 허리 아래쪽으로 옮겼다.
내 안의 화산은 폭발했고, 동시에 바다는 그 뜨거움을 부드럽게 흡수하는 것 같았다. 함께 사진을 찍고 나니 마치 마그마가 분출된 뒤 힘을 잃은 화산처럼,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채 싱글벙글 웃으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그의 older brother도 나를 향해 팔을 벌렸고, 그와의 포옹인사를 마지막으로 후다닥 뛰어서 나왔다.
“딱딱했어?”
“몰라 그런 거 느낄 정신이 없었어.”
다음 날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아이폰 배경화면으로 해놓으니 화면을 볼 때마다 입이 귀까지 걸렸다. 앞으로 인생에 닥칠 그 어떤 힘든 일도 웃으며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비치클럽에 처음 오자마자 친해졌다는 한국인 남자애는 잘생긴 호주 남자애(d)와 맞팔로우가 되어 있었는데, d는 나를 팔로우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팔로우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의 계정에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
‘왜 사진만 찍고 나왔을까’
발리에서의 마지막 날 밤, 덴파사르 공항으로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기사님께 d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상심하지 말라며 another handsome guy(다른 잘생긴 애)를 만나면 된다며 위로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소녀의 마음에 그렇게 불을 질러놓고 가면 어떡해요’
여행이 끝나고 그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호주에서의 그의 삶에 대해 상상해 봤다. 프로필 사진이 서핑 보드와 함께 찍은 사진인 그의 게시물에는 서핑 영상이 많이 게시되어 있었다. 서핑을 하러 발리를 자주 찾는 듯했다. 야생 동물을 보고 가족들과 맥주를 마시며 여유롭게 사는 삶. 정신없게 공부하고 일하고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험한 바다 위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삶.
그의 팔로잉 목록을 확인해 봤다. 함께 팔로잉되어 있는 계정은 팔로워수 491만인 테크노&하우스 음악과 부산 남자애 인스타 계정이었다. 우리의 연결고리. 부산 머스마와 테크노 음악 계정. 화산 깊숙한 곳에 있는 마그마처럼 갑자기 내 안에서 어떠한 거대한 힘이 휘몰아쳤다. 그가 내 계정을 팔로우하는 그날까지! 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을 탓했는데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는 걸 깨달았다. 또 알아? 다시 만나게 될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대화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인생의 잔잔함을 탓했는데 그 모든 잔잔한 순간들은 기회였다.
발리 여행을 다녀온 첫날, 한국에서는 비가 왔다는데 내가 한국에 도착하니 비는 하나도 내리지 않았다. 발리에서도 비소식이 있어 걱정했지만 여행 기간 동안 비는 단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삶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삶이 반복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지더라도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 발리의 햇살처럼 마음속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달의 그림자가 지구에 닿을 때도 곧 다시 보일 해를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기쁨을 느끼며 잔잔하게 출렁이는 날과, 화산처럼 터져 나올 것 같은 날을 동시에 떠올렸다. 발리에서 경험한 화산 덕분에 나는 고요한 삶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발리를 다녀온 지 이틀째. 아주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7km를 50분 동안 천천히 뛰며 여름밤 울려 퍼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집 앞 호수 둘레길 달리기를 하고 왔다. 공허함을 견디기 위해 하는 울분의 운동이 아닌 희망의 운동! 이렇게 운동을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할 수 있는 이유는 당연히 내 아이폰 배경화면에 있는 그와 찍은 사진 덕분이다. 이보다 더 좋은 다이어트 자극 사진은 없다. 나도 누군가가 같이 사진 찍고 싶어 하면 과감한 포즈로 같이 사진을 찍어줘야지! 사소한 친절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
d를 만나고 이틀 후였던, 발리 여행 마지막 날, 서핑으로 유명한 꾸따해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핑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서핑 강습을 받았는데 첫날이니 보드 위에 서는 방법을 배울 것이라고 하셨다. 먼저 서핑 보드에 몸을 알맞게 맞추어 엎드린다. 준비가 되었으면 두 손을 갈비뼈 옆으로 두고 고개를 든 채로 최대한 멀리 본다. 파도가 치는 순간 바로 일어서 균형을 잡으면 된다. 바다에 나가 실제로 해보니 서핑보드 위에 서서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를 가르치던 lucky라는 이름을 가진 강사님은 내가 넘어져 바닷물을 먹을 때마다 서핑 보드 위에 올라와 다시 일어서 보라고 하셨다.
서핑을 하다 바다에 빠져도 일어나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던 순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 위를 평화롭게 유영하고 있을 d도 떠올렸다. 그를 다시 찾아가 말을 걸었던 순간처럼 넘어져도,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시작해 보는 거야! lucky가 귀여운 한국어 발음으로 바다 위에서 외치던
“올라와”
“일어나”
“자신감”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Hello, nice to meet you at FINNS beach club!
[그곳에서 만나서 반가웠어!]
주변이 어둡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거센 파도와 함께 서핑을 하고 있는 너의 모습과 네 미소가 주는 희망을 꼭 기억할게. 타이타닉의 로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