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제와 같은 아침에
약이랑 눈이 부시네
영화 같아 난 드디어
나무 같아, 내 버팀은 이제야 죽을 것 같은 1월
시집 같다고 정리해
♪ 양홍원 - 사계
아스팔트 위에 스며든 습기, 옆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여름은 그러한 계절이다. 여름을 통과한 마음은 쌀쌀한 가을을, 매서운 겨울을 견딜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그렇지 않다면 삶은 살아갈 만한 것이라는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지독히도 오래 혼자 있었으면서도 얼마나 이 삶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놓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이 글은 삶을 위한 고백이다.
여름
모처럼 여름인데 집에만 있는 건 낭비야.
식물들이 볕을 향해 어긋난 팔을 벌리고, 눈 감은 채 태양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니.
몸에는 선크림을 안 발라요. 비타민 D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서.
나에겐 사랑이 전부다. 남아돌고 있는 건 시간이고,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여름날의 공기다. 주변에 울고 있는 건 매미뿐. 모든 감정이 새로워.
그. 러. 나. 어느 날부터 마음 깊은 곳에 물이 고인 것 같다. 빼내려고 거꾸로 놓고 흔들어대도 깨끗하게 빠지지 않고 고여있다.
마르기를 기다린다.
너는 너무 일찍 피어버린 꽃.
내 심장에서 피어난 꽃.
감자의 싹처럼 나를 아프게 해. 멍들게 해.
파내면 피가 나
또 아물게 해.
여름의 끝 무렵이 되면 장마와 함께 베갯잇이 젖어간다. 눅눅하고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것이라곤 무거운 공기뿐이다.
그것을 재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한 번 더.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때를 그리워해. 내 심장은 이미 타버려 검게 변했기에. 어쨌거나 처음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좋은 노래와 좋은 영화 위에 덧씌운 기억이 전부 너라는 사실이 너를 나에게서 떠나가지 못하게 해. 드넓은 운동장에, 햇빛을 가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무방비인 운동장 한가운데, 태양을 향해 두 팔을 펼치던 내 모습을 너는 봤을까.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었을 때,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을 때를 기억해. 이별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 그것을 재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한 번 더. 후회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방비로 사랑에 빠져버린 때를.
21살 여름에는 사랑에 빠졌고, 22살 여름에는 그만해도 된다고 했다. 그 이후 내 안에 차오른 사랑은 갈 곳을 잃은 채 길을 헤맸다. 장마가 시작된 이후 음악을 틀고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까지 깊은 잠이 빠졌다. 조금 더 오래 자고 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봄이었다. 아직 깨어날 때가 아니라 조금 더 누워있으니 다시 여름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까지 합세해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봉쇄되었던 대학 생활도 이제 끝이다. 굳이 무언가를 덮지 않아도 되는, 무방비의 상태. 얇은 천 조각들로만 몸을 가리고,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는 천장을 바라본다.
“학교에서 배운 게 뭐가 있어, 우리가.”
정적을 깨며 말을 꺼낸 건 나였다.
룸메이트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런 말 있잖아. 전공에 영향을 받는대. 그 사람을 보면 무슨 전공인지 느낌이 온대. 세계관이 바뀐대.”
‘음 난 좀 싫은데.’
“난 공부하러 간다.” 룸메이트는 방을 나갔다.
그 애의 책상에는 꽃이 거꾸로 말려져 있다. 남자 친구가 선물로 준 꽃이다. 침대에 누우니 칙칙하고 단조로운 상아색 천장이 보였다. 누운 채로 바로 옆에 놓인 스마트폰을 들어 멜론에 들어가 키드밀리가 2016년 겨울에 낸 싱글을 틀었다. 신이 나는 노래는 룸메이트가 있을 때 함께 듣기도 한다. 이 노래는 같이 들을 만한 노래는 아니지만 지금은 혼자이므로 이어폰 없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스무 살이었다. 대학교에 오면서 분명히 뭔가 새로운 걸 찾기 바랐다. 변화를 원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비슷하게 흘러갔고, 돌아보면 손에 잡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연애라도 진득하게 했으면 사람이라도 얻었지, 이건 손가락 틈으로 다 흘러버린 모래보다 남은 게 없는 대학 생활이다.
너의 스물셋은 곧 촛불처럼 꺼져
스물셋이었구나 이때. 23살에 누군가는 첫 앨범을 냈고,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있다. 영원할 것 같은 대학 시절에 취한 후 남은 건, 빨래건조대 위 바짝 마른 수건처럼 건조한 일상뿐이다.
스물셋의 여름은 가만히 두어도 잘 흘러갔다. 비 오는 날, 텅 빈 학교 헬스장에서 운동하며 우울감을 떨쳐내기도 했고, 아무도 없는 학교 캠퍼스에서 주황빛과 회색빛이 섞인 노을 아래 춤을 추다 적막이 흐르는 방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시간을 학교 앞 공터를 혼자 산책하며 보냈다. 학교 앞인데도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아주 가끔 이름 모르는 동네 주민을 마주칠 뿐이었다.
6월 한 달간 교생실습이 시작되었다. 교생실습에서 내가 본 것은 직장인들의 건조한 눈빛과 지친 얼굴, 후회 섞인 자조였다.
실습 강연을 맡은 교사가 말했다.
“여러분은 퇴근하고 뭐라도 하세요. 제가 뭐라도 했으면 지금 이러고 있지 않았겠죠.”
실습 담당 교사가 말했다.
“시간 많고 방학 있어도 방학마다 여행 못 가요. 유럽 여행 한 번에 400만원인데 4인 가족 4명이 어떻게 방학마다 가요.”
“너 실습 갔다 와서 공부해?” 같은 학교로 실습을 나간 동기가 기숙사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물었다.
“아니. 너는”
“난 인강만 들으려고. 밀리면 따라잡기 힘들 것 같아서.”
실습을 하러 갔다 와 피곤한데도 11월에 있을 임용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기 싫어서 실습이 끝나면 방으로 들어가 밥 먹을 때와 샤워할 때를 빼고는 나오지 않는다. 룸메이트도 남자 친구와 같이 공부하겠다며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실습 끝나고 공부는 무슨'
사실 두 달 전부터 공부를 안 하고 있었다. 실습을 마치고 기숙사에 와서 공부하는 대신 바로 작곡학원으로 간 적도 있다. 4년 내내 같은 대학에 다닌 사람들은 모두 가을에 있을 임용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데 혼자 작곡학원에 다니고 방 안에서 가사인지 시인지를 적고 있으니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왔다. 이게 맞나 싶기도 하지만 하루가 멀다고 업로드되는 인터넷 강의에 숨이 막힐 것 같다. 학교 안에 있으면 점점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밖으로 나갔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아니,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일 년만 참으라고 한다.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으니 태엽은 자꾸만 거꾸로 감긴다. 나의 스물셋은 메마른 땅에 버려지는 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편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