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와주는 건 결국 사계(2)

겨울

by 연하

겨울


그해 겨울, 1차 합격자 발표일. 오늘은 일찍 눈을 떴다. 아침 7시, 패딩을 입고 아직 어둑한 학교를 빠져나온다. 9시 22분 청량리역, 강릉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한다. 10시에 있을 합격자 발표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노트북을 꺼낸다. 12월 15일. 올해도 의미 없는 한 해가 저물어가겠구나. 내 시간은 그를 마지막으로 봤던 작년 여름에 멈춰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예상했던 대로의 결과를 확인한 후 대충 사진을 찍은 뒤 노트북을 덮는다.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첫 끼로 무엇을 먹을지 검색한다. 1차 시험에 떨어졌음이 분명해지자, 도대체 왜 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던 2차 스터디를 이제는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1차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그에게 오랜만에 연락했지만 답장은 이어지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이어폰을 꽂고 Hash Swan의 Airplane Mode를 들었다. 가사 한 줄 한 줄이, 내 마음과 완벽히 겹쳤다.


쇳덩어리 철도 위를 걸어

정해진 그곳으로

난 알고도 표를 끊었어

이제야 보이네 풍경


♪ Hash Swan - Airplane Mode (Feat. Leellamarz)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 서울로 응시했으나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고 싶다. 네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영원히 너의 존재를 잊고 싶다. 그러나 너는 이곳까지 날 따라온다. 기차가 출발했던 청량리역, 조금만 더 걸으면 너와 닿을 수 있는 곳. 그러나 나는 다시 멀어지기를 선택했다.

시험 생각보다 네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아니 생각이 날 떠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다. 벗어나려 할수록 너라는 존재는 멈추지 않고 나를 다시 옭아맸다. 그 순간들이 나에겐 가장 큰 고통이었다. 지금도 나에게 고통이 있다면 너를 벗어나려 최대한 멀리 떠나와도 생각은 절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 어디를 가든 나를 따라온다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누군가 내 눈을 가린 채 데려왔다면 바다인지도 모를 만큼 까만 밤바다를 바라보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너를 생각했던 그 시간만큼

정확히 그만큼

너와 멀어지고 있었다는 것.


감정이라는 게 쓸모가 있을까. 예술가가 될 것이 아니라면 이런 감정 따위 묻고 살아가는 게 현명한 것일 수도 있겠지. 답답한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더더욱 세상과 단절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어폰을 꽂고 세상의 소리를 차단한 후 깜깜해 보이지도 않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노래를 들었다. 스마트폰 화면 속 앨범 표지가 붉은빛과 파란빛이 어른거리는 모래사장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멀지

허나 같은 도시에 있어도

멀어진 사람이 더 멀지


너가 좋아했던 내 미공개곡

비행 내내 것만 들었지

내가 나의 돈들과 인기를 다 잃어도

아니, 그게 뭔 상관이야 이 순간

서울을 벗어나니 돌아오는 원래의 나

다들 무관심해 내게 마치 원래의 나


그래, 참 멀어졌어, I know

왼손은 라, 오른손은 highest note

왼손은 너, 오른손은 나이고

타고 만남 안돼 글리산도 아마 그러긴 힘들 거야

그래도 빌어봐 난 이렇게

네 젊음이 너를 이곳 데려올 거야


♪ CHANGMO - Meet me in Toronto (Feat. Paul Blanco)



젊음. 그렇다. 나의 21, 22, 23살 젊음에는 모두 네가 있었다. 너를 빼고는 나의 젊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너의 젊음 한 장면 속에는 내가 남아 있을까. 무언가를 바라는 것에 돌아오는 것은 실망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안다.


오늘의 나를 위해 예약해둔 펜션은 눈치 없이 넓다. 텅 빈 공간이 나의 감정을 증폭해 준다. 숙소에 있는 제트 스파에 입욕제를 통째로 부어 넣는다. 거품이 흘러넘쳤다. 그 모습이 꼭 나를 닮은 것 같아 허탈한 웃음이 났다. 이대로는 방 전체가 거품으로 가득 찰 것 같아 물을 조금 빼고 다시 따뜻한 물로 채웠다. 몸을 푹 담갔다. 발을 쭉 뻗어도 남을 정도로 큰 욕조가 마음에 든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애초에 오늘 밤은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므로 물속에 잠긴 나는 평온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 하얗고 폭신한 이불 속에 안겼다. 이내 충만함이 느껴졌고 몸 전체가 떨렸다. 내 안이 가득 차 있는 느낌. 이런 기분을 느껴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이었다. 그날은 바로 잠이 들었다.


밤이 내 예상보다 더 기네

삶이 내 예산보다 더 기네

빛처럼 빠른 시간을 잊게 해 줘

눈이 멀겠어 이른 햇빛에


♪ 양홍원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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