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봄/가끔 허기가 진다/모처럼 여름이다
안산의 봄
뉴욕 여행을 다녀와서 바로 동네 주민이 여름에 알려준 헬스장을 등록했다. 그러는 새 봄이 왔고 뉴욕에서 받아온 양의 기운을 토대로, 속눈썹 연장을 하고 파티걸로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대화할 사람을 찾으러 여러 모임을 다녔는데 그 중 한 모임에서 알게 된 남자와 한 달 조금 안 되게 만났다. 장기간 연애를 하지 않아 부족해진 서로의 도파민을 충족시켜준 연애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짧은 만남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최악이었는데, 그 말이 여운에 남아서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과 카톡을 모두 차단했다.
벚꽃 시즌에 만난 그와 헤어지기로 하고 바로 다음 달인 5월부터 그에게 영감을 받은 퇴폐적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은 술과 담배를 좋아했기에 몰입하기 위해 집 앞 편의점에서 여러 나라의 캔맥주를 종류별로 샀다. 술을 마시며 글을 쓰고, 빈 맥주 캔을 깨끗이 씻어 자취방 창문에 진열해두었다. 말보로 레드도 한 갑 사서 한 개비를 뺀 후 방 전체에 퇴폐미가 돌 수 있도록 빈 캔맥주 옆에 놓아두었다.
안산의 여름
여름이 시작된 지도 모르고 계속 글을 썼다. 6월과 7월에는 운동할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니던 헬스장을 그만두었다. (두 달 후 다시 헬스장에 가서 인바디 결과를 확인했을 때, 앞으로 글은 안 써도 운동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 후 주말을 남겨둔 금요일 저녁, 내 방 탁자 위에는 삿포로 맥주 350 ml 한 캔과 큰 얼음조각이 둥둥 떠 있는 얼음물이 담긴 텀블러가 나란히 놓여 있다. 여름에 마시는 삿포로 맥주는 겨울 도쿄에서의 추억을 상기시킨다. 오늘은 3시에 조퇴를 하고 바로 수영장으로 갔다. 평영으로 물을 차며 일주일간 쌓인 스트레스와 노폐물을 물에 녹이는 의식을 치렀다.
수영을 마치고 간 공원에서 돌 사이에 끼인 세잎 클로버들과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들을 관찰한다. 한 쌍의 연인은 방금 만나 반가워하며 손을 잡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서로의 볼과 배를 만지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애정을 표현한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눈부신 떨림. 이런 걸 처음부터 다시 느껴보고 싶다. 공원에서 누군가가 마이크 앰프를 연결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기분에 애절한 음악은 겉돌기만 할 뿐 흡수되지 않는다. 지금은 울고 싶지 않은 상태. 블루투스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고, ‘검정치마의 Tangled’로 먼 곳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선율을 밀어낸다.
summer's never coming again
여름은 절대 다시 돌아 오지 않을 거예요.
we will tangle in the wind and rain
우린 비바람 속에서 뒤엉킬 거예요.
but love stay with me
그렇지만 사랑은 나와 함께일 거예요.
love stay with me
사랑은 나와 함께일 거예요.
많은 것들을 밀어낸 후에야 비로소 금요일 밤을 맞이한다.
가끔 허기가 진다
주문하면 5분 내로 나오는 햄버거. 130만 원짜리 위스키를 주문하고, 클럽에 있는 여자애들과 노는 멋진 백발을 가진 할아버지. 오마카세는 빨리 내놓으라고 해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게 오마카세니까.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며 먹어치우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허기가 지니 아무거나로 때운다.
언제부터인가 미장센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끝내 이데아와는 만나지 못하고 동굴 속에서 헤매다 가는 삶. 사람들을 망친 건 이데아에 집착한 플라톤일까? 오늘도 자취방에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다. 커다란 거울 속 허상을 바라보며, 오늘이 지나면 영원히 보지 못할 나를 마주하며.
모처럼 여름이다
쨍쨍한 볕 아래 마음을 빠짝빠짝 말리고 소독해야겠다 생각했다. 해가 쨍쨍한 한낮의 여름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집 앞 공터로 나가 그늘진 벤치를 찾아 앉는다. 꼭두각시 인형의 몸에 연결된 실이 인형의 고개를 땅으로 끌어 내리려 하는 것처럼, 나는 고개를 하늘로 끌어 올리기 위해 링거액을 맞듯 귀에 이어폰을 꽂고 희망찬 가사로 채워진 노래들을 몸속에 집어넣었다.
살아야지, 나는 살아 너에게
네가 살고 싶은 세상이 되어줘야지
험난한 세상 속 너는 언제까지나
나의 마음속 영원한
교토
♪ 위수- 교토
차갑게 꽁꽁 얼었던 마음이 태양 빛에 서서히 녹기 시작한 듯 심장이 미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