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헝거

사부작, 거리는 사랑

by 연하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봤다. 여자 주인공은 팬터마임을 하는데, 없다는 걸 잊으라는 말이 나온다.


없다는 걸 잊어라.


영화 전체로 확장을 하면 인생이 의미가 없다는 걸 잊으라는 말로도 통한다.

혹시 너무나 많이 고민하고, 매 순간 과도하게 신중을 기한 것이 아닐까.

도대체 무엇을 찾으려고 헤맸던 걸까.


결국 인생을 좌우하는 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인데. 이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얼마나 수고로웠던가, 의미를 찾으려 발악했던 나날들은.


2.


영화 <비긴 어게인>의 ost lost stars에는

Best laid plans sometimes are just a one night stand라는 가사가 나온다. 영화를 본 지 오래되어 줄거리는 거의 잊었는데,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오랫동안 사랑한 사람과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방황하던 화자가 얼떨결에 자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렇게 오래 준비한 시험도 떨어지고 하룻밤 만에 결정한 강릉행. 정작 먼 미래에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계획하지 않은 것들이다. 원래 그런 법이다. 뇌에 충격을 주기 때문일까.


퇴근하면 뇌를 뺀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을 다룬 영화와 소설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인공적이고 문명적인 것들에 질려버렸다. 숨이 막힌다. 예의 있는 소설과 예의 있는 영화는 만들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는 이미 온갖 예의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혼자 조용히 읽는 소설과 영화는 인간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을 다뤄야 마음을 울린다.


3.


가끔은 퇴폐적인 노래를 듣고 싶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나뭇가지의 팔과 다리가 앙상해질 때 즈음 테일러스위프트의 fortnight라는 노래를 들으면 좋다.


All my mornings are Mondays stuck in an endless February

(모든 내 아침은 끝없는 2월에 갇힌 월요일 같아.)


나는 여름이 좋고 겨울만 되면 괜히 울적해진다. 그런 내가 2월에, 그것도 월요일에만 갇히며 살 수 있을까. 대부분의 날들은 의미가 없다. 인생에 의미가 있는 날들은 몇일뿐이었던 것 같다. 그 외에는 추억하는 날들일뿐이다. 그날들만 반복하는 것이다. 그때를 회상하는 또 다른 날일 뿐이다.


의미가 없는데, 의미를 찾으려고 하니 좌절하는 것이다.

그래도 여름밤공기가 좋으니 사는 것이다.

가을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한다.

오늘 사람들에게 내일이 없는 듯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게 살라고 했다.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4.


이 시대에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불가능이란 없다.

우선 배고파 굶을 일이 없다. 주문하면 5분 내로 나오는 햄버거처럼.

130만 원짜리 위스키를 주문하고, 클럽에 있는 여자애들과 노는 멋진 백발을 가진 할아버지처럼.

그러나 오마카세는 빨리 내놓으라고 해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게 오마카세니까.

그게 햄버거니까. 그게 인생이니까. 오마카세는 먹기를 원하지만 수많은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어치우는 삶.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와 간 모텔방에서는 킬링타임용 영화나 본다. 일종의 미장센.

끝내 이데아와는 만나지 못하고 동굴 속에서 헤매다 가는 삶.

사람들을 망친건 어쩌면 이데아에 집착한 플라톤일까?


오늘도 자취방에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다. 양홍원의 한시에 맞추어, 커다란 거울을 속 나를 보며, 영원히 보지 못할 나를 마주하며.


완벽한 미장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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