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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상원 Sangwon Suh Mar 25. 2016

혼돈과 낭만, 리오에서의 3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있었던 나흘간의 출장을 마치고 주말을 보내기 위해 리오로 향했다. 이번엔 출장 전 일정이 바빠 브라질이나 리오에 대해 사전에 공부를 별로 못했다. 다만 리오라면 정부 청사들로 채워진 20세기 계획도시, 브라질리아 보다는 뭔가 더 흥미로운 것이 있겠거니 싶긴 했다.

리오는 브라질 남동 해안에 위치해 있다.

리오

리오의 정식 명칭은 'Rio de Janeiro'. 포르투갈어로 '1월의 강'이라는 뜻이란다. 1502년 1월 포르투갈인들이 리오의 구아나바라(Guanabara) 만(灣)을 발견하면서 이를 강의 어귀로 잘못 알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650만 명이 거주하는 이곳은 상파울루(São Paulo)에 이어 브라질에선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1992년과 2012년 세계 정상회의, 2014년 월드컵, 2016년 올림픽의 도시이기도 하다. 나중에 더 얘기할 'The Girl From Ipanema'에 등장하는 '이파네마'도 바로 리오의 한 동네 이름이다.  


첫날 저녁: 리오의 비

국내선 공항에 내려 호텔로 가는 길. 차창 너머로 본 리오는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다. 교통질서도 엉망인데다 올림픽 준비로 이곳저곳에서 도로 공사,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라 정체가 심했다. 30분이면 올 거리를 한 시간도 더 걸려 코파카바나(Copacabana) 해변에 위치한 호텔에 겨우 도착했다.


저녁이나 먹어볼까 하고 슬슬 호텔을 나와 무작정 걷다가 비를 만났다. 빗줄기가 제법 굵다 싶었는데 조금 있자니 갑자기 도로에 물이 불어나기 시작한다. 어느새 차오르던 물이 도로를 넘어서 인도까지 범람했다. 도로는 금방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바지를 걷어붙이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사람, 옷가지와 세간살이를 챙기는 노숙자들, 냇물을 건너듯 도로를 건너는 노인, 갑자기 불어난 물에 어쩔 줄 모르는 차량들, 울려대는 경적. 잠깐의 폭우는 너무나도 쉽게 리오의 거리를 혼돈의 세계로 만들었다.


나도 비를 쫄딱 맞고 바지를 다 적시고 나서야 겨우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통령 탄핵 시위와 3분 수상

출장을 준비하면서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의 탄핵 시위에 대한 뉴스를 접했는데 역시나 리오에서의 첫날밤 비가 그치자 바로 내가 묵었던 호텔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덕분에 창문 너머로 시위 광경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다.

내가 본 이곳 시위의 특징은 각종 소음을 발생시키는 여러 기구들. 엄청 시끄럽다. 그러나 이곳의 시위엔 물대포도, 차벽도 없었다. 시위는 시끄럽긴 했지만 전혀 폭력적이라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탄핵 위기에 몰린 호세프 대통령은 이날만 해도 자신의 정치적 스승, 룰라 다 실바(Luiz Inácio Lula da Silva) 전 대통령을 수상으로 전격 지명하면서 위기를 타개하나 싶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아무런 정규 교육 이력이 없는 노동자 출신으로 2002년 대선에 성공하면서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라 불렸고 아직까지도 상당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브라질 연방법원은 진행 중인 룰라 전 대통령의 비리혐의에 대한 수사를 이유로 임명 3분 만에 그의 수상직을 박탈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수사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국민적 영웅이었던 룰라 전 대통령도 고질적인 부패 고리를 끊지 못한 것 같아 씁쓸하다.


둘째 날: 코파카바나, 이파네마 해변

늦게까지 계속된 시위로 잠을 설쳐 느지막이 일어났는데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부터 또 비 소식이다. 어차피 주말에 잠시 쉬러 온 곳이니 오후엔 호텔에서 머물기로 하고 비 오기 전 얼른 코파카바나 해변과 이파네마 해변을 걷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코파카바나 해변과 이파니마 해변은 서로 이웃하고 있어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다. 둘 다 상당히 긴 해변이다.

코파카바나(Copacabana) 해변

이 두 해변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해운대나 광안리라고 할까? 리오에서는 무척 '핫'한 해변이라고 한다. 잘 정비된 보도에는 액세서리와 장식품들을 파는 좌판이 펼쳐져 있고, 모래사장엔 개구쟁이 어린아이들부터 파도가 지나간 해변을 천천히 걷고 있는 노인들까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해변의 즐거움과 낭만을 만끽하고 있다. 어제의 교통체증, 폭우가 만든 혼돈의 리오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해변에서 본 리오는 너무나도 평화롭고 낭만적인 모습이다.


The Girl from Ipanema

이파네마 해변 입구엔 보사노바의 왕,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ônio Carlos Jobim)의 동상이 있다. 리오 국제공항의 정식 명칭, 'Galeão–Antonio Carlos Jobim International Airport'도 그의 이름을 땄을 정도로 그는 까리오까(Carioca: 리오 사람)들에겐 국민적 영웅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작업실에서 활동했던 그는 1962년 이파네마 거리를 거날던 당시 17세의 소녀 헬로 핀에이로(Helô Pinheiro)를 보고 영감을 얻어 'The Girl From Ipanema'를 작곡했고, 이 곡은 공전의 히트가 된다.

젊은 사절 헬로 핀에이로

헬로 핀에이로는 이 곡의 세계적인 대 히트와 함께 유명 인사가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의류 브랜드, 'Garota de Ipanema' (포르투갈어로 'Girl from Ipanema')를 내고 모델로도 활동해 큰 성공을 거둔다. 현재 70대인 그녀는 아직까지도 많은 까리오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The Girl from Ipanema'는 비틀즈의 'Yesterday'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녹음된 곡이라고 한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녹음 중 하나를 꼽는다면 아마 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와 스탄 게츠(Stan Getz)의 1963년 녹음을 빼놓을 수 없다. 엘리베이터 음악으로 워낙 많이 쓰여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곡.

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와 스탄 게츠(Stan Getz)가 부르고 연주한 'The Girl From Ipanema' (1964)

이 녹음에 얽힌 스토리는 이렇다. 포르투갈어로 된 조빔의 원곡은 자오 질베르토(João Gilberto)가 보컬로 참여했는데 자오 질베르토는 영어를 할 줄 몰라 노먼 김벨(Norman Gimbel)이 지어준 영어 가사를 노래할 수 없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 중 서툰 발음의 영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오의 아내, 아스트루드였던 것.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전문적인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교 없는 평이한 창법에 포르투갈어 억양이 강하게 섞인, 조금은 투박한 영어 발음으로 이 곡을 녹음했는데, 오히려 그녀의 편안한 창법과 서툰 영어가 보사노바 리듬과 어우러져 남미의 낭만과 편안함을 전달하는데 제격이었던 것. 이 녹음은 세계적인 대 히트를 기록하고 아스트루드는 자오와 결별, 미국으로 건너와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게된다.


결과적으로 자오는 영어를 못했던 탓에 히트곡을 혼자 취입할 수 있는 기회 뿐 아니라 아내 마저 잃게 된 셈. 영어에 대한 울분은 자오가 갑이네.

어째든 이 곡을 들을 때 전문적인 가수가 아닌 일반인이 서툰 영어로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제대로 들은 셈이다.


두 시간 남짓 이파네마 해변을 걷다 보니 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또 비가 올 것 같다. 어제의 낭패를 피하기 위해 얼른 호텔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 코르코바도, 슈가로프

다행히 마지막 날의 일기 예보는 '맑음'. 비행기 시간이 저녁이라 아침 일찍 코르코바도(Corcovado)로 출발했다. 코르코바도는 세계 최대의 도시림이 자리한 리오의 티주카(Tijuca) 국립공원 내 해발 750미터의 봉우리다. 산의 입구까지 버스가 있고 거기서 부터는 산악 기차가 다닌다. 코르코바도라는 이름보다는 이 봉우리 정상에 세워진 38미터 높이의 예수상, 크리스토 레덴토르(Cristo Redentor)로 더 유명하다. '보상해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의 크리스토 레덴토르는 말없이 리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굽어보고 있다. 누구에게 보상을 해 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외계인의 침략이라든지 지구의 종말을 다룬 영화에서 브라질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올 때면 어김없이 애꿎은 크리스토 레덴토르가 봉변을 당한다. 롤랜든 에머리치(Roland Emmerich) 감독의 2009년 작 '2012'에서도 크리스토 레덴토르가 무너지는 장면을 공식 포스터로 사용했다가 브라질 천주교구의 비난을 받고 감독이 공식 사과하고 포스터를 교체해야 했다고 한다.  

영화 2012의 초기 포스터

그러나 코르코바도의 백미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리오의 경관이었다.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오는 리오의 모습은 보기 드문 장관. 리오의 중심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마리나, 슈가로프(sugarloaf) 봉우리, 그 너머로 구아나바라 만(灣)이 보이고, 그 뒤로는 니테로이(Niterói) 시(市)를 둘러싼 산맥이 보인다.  

코르코바도에서 내려다본 리오의 슈가로프와 마리나

코르코바도의 예수상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슈가로프(sugarloaf)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시절 이곳의 특산품인 사탕수수를 정제한 설탕이 주요 수출품이었는데 당시 설탕의 포장 단위가 로프(loaf)였다. 그 모습을 보면 왜 이 봉우리를 슈가로프라고 부르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베를린 설탕 박물관의 슈가로프 (credit: FA2010, 2008)
코르코바도에서 본 로드리고 데 프레이타스(Rodrigo de Freitas)호수와 이파네마의 해안

다음 행선지는 슈가로프. 차로 약 40분 정도 걸려 슈가로프 입구에 도착했다. 거기서 부터는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다 (암벽등반도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리오의 마리나, 국내선 공항, 우르카 해변, 코파카바나 해변, 구아나바라만의 풍경이 이 360도로 펼쳐진다.

슈가로프로 가는 케이블카 승강장 주변
슈가로프에 오르는 케이블 카
올림픽 세일링 경기가 열린다는 리오의 마리나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르카(Urca) 해변과 그 너머의 코파카바나 해변

슈가로프에서 바라본 코르코바도. 어느새 크리스토 레덴토르는 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아침 일찍 다녀오길 잘 한 모양이다.

슈가로프에서 본 코르코바도

아침부터 부지런을 떤 덕분에 늦은 점심 무렵에는 호텔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호텔 옥상엔 작은 실외 수영장이 있는데 수영장은 볼품없지만 그곳에서 바라보는 경관만큼은 훌륭했다. 하늘 위로는 뾰족한 날개의 군함새(frigate bird) 무리가 날아다니는 것이 꼭 영화, 쥬라기 월드를 연상시킨다.  

호텔 옥상에서 본 군함새 무리

이 곳에서는 코파카바나 해변과 슈가로프가 한눈에 보인다. 슈가로프를 보니 벌써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오후 내내 구름이 걷히지 않았다.

호텔 옥상에서 본 슈가로프, 코파카바나 해변

모쿠에카

브라질 음식 하면 아마도 삐까냐(picanha)라는 소 꼬리 쪽 등부위의 바비큐를 많이 꼽는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탐닉했던 브라질 음식은 그러나 모쿠에카(moqueca). 코코넛을 넣은 해물 스튜로 밥이랑 같이 먹는데 좀처럼 흉내내기 어려운 묘한 맛이 있었다. 공항으로 떠나기에 앞서 다시 찾은 곳은 물론 모쿠에카를 파는 레스토랑.  

리오에서 맛 본 모쿠에카(moqueca)

여행을 마치며

리오에 도착했을 때 이곳의 교통상황을 본 터라 돌아갈 때는 아주 일찌감치 호텔을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구글 맵에서 40-50분 걸린다는 정보를 보고 나왔는데 도중에 사고가 있었는지 1시간 40분이 걸려서 공항에 도착했다.


그렇게 3일간의 리오 여행이 끝났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리오의 여러 면모를 다양하게 경험해 본 것 같다. 교통 체증, 침수, 탄핵 시위에서부터 이파네마의 낭만과 코르코바도의 장관까지, 혼돈과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리오.


오늘은 'The Girl from Ipanema'나 다시 들어봐야겠다.

자오 질베르토가 스탄 게츠와 같이 참여했던 1963년 앨범, "Getz/Gilberto" 자오와 아스투르드가 같이 부른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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