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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Jin Nov 27. 2020

이는 닦지만, 세수는 하지 않을 거야,

김장을 하고 왔다. 이미 소금에 기운을 빼앗긴 힘없는 배추가 마당  위에 늘어져 있었고,  평상 위에서 동네 할머니들배추 속을 만들고 있었다. 새벽에 서둘러 서울을 떠났지만 점심때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갈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떼놓고, 여동생이 운전하는 차에 가벼운 배낭을 집어던지고 검정치마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도시를 두고 떠나는 이방인처럼,  약간은 설렜다.


절인 배추를 나르고, 배추 꼭지를 다듬고, 무를 쪼개고, 가져온 김치통에 김치를 담고, 뒷정리를 하고, 우리 집 김장을 도우러 온 동네 할머니들과 도시에서 가져온 빵을 나눠 먹고, 설거지를 하고, 일찍 자리에 누웠다. 따끈한 온돌방에 엄마, 나, 여동생 셋이 나란히 피곤한 몸을 뉘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세계를 걸었다. 엄마는 엄마의 하나님께 기도를 했고, 여동생은 방문을 열고 새까만 산골의 밤을 걸으러 나갔다. 나는 넷플릭스가 보여주는 허무맹랑한 세계에 속절없이 나를 맡겼다. 여동생이 묻혀온 깜깜한 밤의 한 조각. 그 밤 속으로 걷고 싶었으나, 여전히 나는 용기가 없었다.


밤 내내 허둥대던 나는 늦게 일어나 성당에 간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아, 부끄럽게 그 밥을 다 챙겨 먹고는 다시 누웠다. 여동생이 세수라도 하라고 했다. 이는 닦겠지만, 세수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양치는 하는데 세수는 안 하겠다는 건 도대체 무슨 논리냐고 여동생이 물었다. 이는 닦지만 세수는 하지 않는, 이 치졸함. 이 흐리멍덩하고 치졸하고, 소심하고, 나약한 실행.  꽤 적지 않은 나이를 먹는 내내, 이는 닦지만 세수는 하지 않는, 이 어설픈 경계에서 이도 저도 아니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성당에서 돌아온 엄마가 배추와 무우를 챙겨준다. 다 귀찮고, 나는 어차피 밥도 안 하니, 여동생에게 다 주라고, 그러면 그 집에 가서 가끔 얻어다 먹겠다 했다. 여동생이 또다시 눈치를 준다. 어쩔 수 없이 배추 몇 포기 받아 가슴에 안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배추가 예뻤다.


안뜰의 단풍이 아직 지지 않았다. 날은 흐린데, 아직 떨어지지 않은 강마른 단풍잎이 슬프게 매달려 있었다. 문막, 여주, 이천을 지나면서 세수하지 않은 얼굴이 점점 신경 쓰였다. 그 누구도 마추지치 않길, 더 망가지길, 바랐지만, 아무 일 없듯 저녁 7시, 줌 화상회의에 접속했다. 온전히 서울로 올라오지 못한 내 몸은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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