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았다. 도서관 창틀에 나란히 놓여있는 화분과 몇 칸 안 되는 서고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너를 보는 것이,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네가, 주말 아침 햇살을 받은 너의 옆모습이, 펜을 쥔 너의 튀어나온 엄지손가락 마디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도서관 앞에서 졸고 있던 네가. 그 모든 것이 좋았다.
그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경영학과, 경제학과에 주로 대학 원서를 쓸 그들에게 외국 소설과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의 토요일 아침이 그다지 유용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저 함께 읽고, 보고, 이야기하고, 귤을 까먹던 2016년 토요일 아침들이 그들에게는 어떻게 기억될까?
오르한 파묵의 '아버지의 여행가방'을 읽는 것으로 우리의 첫 시간은 시작되었다. 파묵의 아버지가 해외 출장길에 묻혀온 이국의 낯선 냄새와 시를 쓰던 사업가 아버지의 욕망이 출렁이던 가방으로 은유된 문학이라는 것, 혹은 글이라는 것에 대해 아이들과 얘기해보고 싶었다. '아버지', '여행', '가방' 세 단어의 조합이 환기하는 친숙함과 낯섦, 정주와 유랑의 이미지에 대해, 아버지와 여행에 대해, 너의 여행에 대해, 18살 소년들의 출렁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내 직업의 테두리 안에서 찾으려고 애쓴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너와 나의 이야기가 서로 흘러들어 우리가 미처 닿지 못했던 낯선 곳으로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런 내 기대와 달리 처음 만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고, 우리가 만났던 교실에는 어색함의 칼바람만 불었다. 18살 아니던가,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토요일 아침 교실에서, 뿌연 자기 마음에 오가는 말들을 경계심 없이 끄집어낼 것이라고 기대한 선생의 미숙함만이 오롯이 부끄럽게 남았다.
둘째를 낳고 똥기저귀 갈고, 이유식 밥그릇을 싱크대에 집어던지다가 학교로 도망치듯 달려들어 온 아줌마 선생의 꿈은 그렇게 보기 좋게 끝장날 줄 았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토요일 아침 8시를 잊지 않고 달려와 준 고마운 그들 덕분에 우리는 두 학기에 걸쳐 꽤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오에 겐자부로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들, 쑤퉁의 '등불 세 개', 스트벨라나 알레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한스 페터 리히터의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허은의 구술집, '굿바이 프렌드'. '반딧불의 묘'. '의지의 승리'까지. 금요일 늦은 시각까지 머릿속으로 다음날 아침에 내가 해야 할 말과 그 속에 흘러 들어올 그들의 말을 생각했다.
때론 검열자의 눈으로, 때론 감상자의 눈으로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봤던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들 덕분에 또 한 시절을 넘어가고 있음에 혼자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토요일 아침 도서관에서 우리가 같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때, "창밖의 은행잎은 더욱 노래지고, 앵봉산의 단풍은 더욱 짚어지고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 내어 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