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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는 탔지만, 배려는 못 탔다.

교과서엔 없는 세상을 바라보는 첫째 딸의 마음과 아내의 취미활동

by 담연 이주원

아내는 알뜰하다. 음. 알뜰하다고 다들 칭찬한다.

22년을 부부로 살아온 남편의 눈으로 정확히 말하면, 할인에 약하다.

신혼 초에는 중고나라를, 첫 아이 육아에는 당근마켓을, 요즘은 온누리 상품권에 푹 빠졌다.


'알뜰하다'는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1. 살림이나 일 따위를 매우 정성스럽고 야무지게 잘하는 태도

2. 돈이나 물건 따위를 함부로 쓰지 않고 꼭 필요한 데에만 쓰는 태도
요약하자면, 세심하고 신중하게 살림을 꾸려나가고 절약, 합리성, 계획성을 갖춘 소비습관으로 볼 수 있다.

아내가 서운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집은 다양한 아이디어 상품과 한번 쓰고 창고에 있거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 꽤 쌓여있다. 아내가 말하는 이유는 편리해서, 중고라서, 할인해서 구매한 것이다. 난 현상을 아내의 취미활동으로 규정한다. 취미활동은 존중해줘야 한다. 가정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여하튼 요즘 취미활동은 온누리상품권 수집이다. 연초나 명절 무렵 어김없이 "10% 할인"이라는 문구가 그녀의 눈에 노출되면 클릭과 함께 근처 은행으로 달려간다. 1인당 한도가 있으니 나를 동원하기도 한다.

나는 묻는다.

"할인한다고 다 사야 돼?"

아내는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한다.

"할인할 때 사두는 거야. 그게 이득이야."


다자녀 가정에 신도시에 사는 맞벌이 부부는 멀리 있는 시장에 자주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쌓여가던 상품권을 드디어 사용하기로 했다. 얼마 전 토요일 제일 가까운 시장으로 삼남매를 데리고 출발했다.

아이 셋, 유모차 하나, 그리고 우리 부부와 상품권이 나서는 전통시장 나들이는 그 자체로 이벤트다. 그날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갔기에 더 챙길 게 많았다. 전철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치 못한 큰 아이의 사회학 수업이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줄이라기엔 애매한 무리지은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도 있었고, 유모차도 있었고, 겉보기에 특별히 불편해 보이지 않는 젊을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유모차와 함께 줄 끝에 섰고, 엘리베이터 안은 우리 앞에서 가득 찼다. 유모차를 끌고 온 다른 가족은 앞에 있었는데도 타지 못했고 우리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들의 질풍같은 속도에 밀려난 것이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문은 닫힘 버튼을 눌러도 바로 닫히지 않고 일정시간이 지난 후 닫힌다. 그렇게 그들과 유모차를 끌고 있는 우리 사이에 어색한 눈 맞춤이 잠시동안 이어졌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우리 쪽을 보며 말했다.

"다음에 편하게 타세요."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말이 흘러나온 표정과 눈빛은 '편하게'보다 '불편하게' 다가왔다.


한창 규칙에 대해 배우는 중이라 규칙과 공정함에 예민한 초등1학년 큰 아이가 그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리곤 문이 닫히고 올라가는데 아이가 곧 말문을 열었다.


"교통약자용 엘리베이터라고 쓰여 있는데 지키는 어른도 있고 안 지키는 어른도 있네. 우리는 잘 지키자 아빠!"

그리고 덧붙였다.

"유모차랑 동생이 없었으면 우리도 못 타는 거지. 맞지 아빠!"


여러분도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보았을 테다. 나도 아이가 없었다면 저 엘리베이터 한편에 서서 무거운 짐이 있으니, 너무 피곤하니 등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있었을 수도 있다. 부끄러움, 공감 그리고 이 상황을 화내지 않고 잘 받아들이는 아이를 보며 느끼는 안도감이 혼재된 감정으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왔다.


나는 그날의 사건을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우리 사회가 배려라는 문화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작은 에피소드라 믿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라 믿고 싶다.

한때는 대중교통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일상이었고,

임산부석과 노약자석이 "양보받길 윈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가 지켜야 할 약속"이 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횡단보다 앞 일시정지, 어린이 보호구역 내 감속 의무, 장애인 주차구역 비워두기 등 등

이 모두가 법으로 시작해 문화로 자리 잡기까지 우리 사회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의 엘리베이터 사건도 하나의 과도기적 장면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교과서와 다른 실제 현상을 보면서도 성숙하게 배려라는 문화, 사회가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또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규칙'을 자신은 지키겠다고 말하는 큰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어찌 보면 인상을 찌푸리고 기분이 찜찜했을 사건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개의치 않고 즐거운 시장투어를 했다. 알뜰한(?) 아내 덕분에 할인 상품권으로 저렴하게 참외, 망고, 두릅, 오이, 식혜, 떡 등 한가득 장을 봤고, 분식집에서 떡볶이, 김밥, 튀김을 사 먹고 군것질로 도넛도 먹었다.


시장은 육체적으로 피곤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마트 장 볼 때 보다 훨씬 가볍다. 시장에는 아이들을 유혹하는 장난감 진열대도 과자 진열대도 없기 때문이다.


그날 아내는 상품권을 쓰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만족의 무게만큼이나 아이의 말 한마디가 오래 가슴에 남아있다.


우리 곳곳에 적힌 '배려'라는 문구는 선택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 약속을 성숙하게 받아들이고 지켜낼 거라는 믿음을 얻은 그 시간이 꽤 괜찮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된다면 이번 주말은 마트보다 전통시장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

혹시 모를 아이와 함께 배울 수 있는 사회학 수업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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