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을 가진 당신께

열아홉 번째 편지

by 윰세

베스트셀러의 목록을 보면

초긍정의 언어로 자기 위안을 주는 독서 목록이 많습니다.

그만큼 삶을 살기가 각박하고 어렵다는 뜻이겠지요.

저도 초긍정의 언어로 힘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2023년 10월에 첫 소설을 완결한 뒤,

제 안의 가치관이 더 이상 하나로 유지되지 않아 힘들었지요.


이전에 믿어왔던 것들과 새로 유입된 사유가 서로를 밀어내며 충돌했고

그 사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괴리가 생겨났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 특히 <시지프 신화>가 말하는 부조리와 반항의 개념을

끝까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존주의를 이해했다기보다

카뮈의 사유를 동경했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겁니다.


그 이후, 약 2년 넘게 세계가 서서히 분리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실의 위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감각은 다른 곳으로 서서히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세계 속의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지요.


분리가 시작된 날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2023년 11월 8일이었습니다.


구역감이 나는 현기증을 견뎌내기 위해

제가 선택한 건 초긍정의 언어들이었습니다.

카뮈의 언어와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초긍정의 단어들은 매력적입니다.

고통을 즉각적으로 완화해 주고

잠시나마 나를 견딜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줍니다.


나 자신을 붙잡기 위한 노력으로

데일리 스케줄러에 이런 글귀를 적어 놓았더군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받아들여.”

“행복이 나의 운명이야.”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난 치유되었어.”


등의 글귀들은 사탕처럼 즉각적인 위안을 주었지요.

입안에서는 달콤했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공허는 깊어졌습니다.


당 스파이크로 인해 저혈당을 느끼는 사람처럼

기운 없이 쳐지고 식은땀을 흘리곤 했지요.


예전의 방식으로 나를 회복해 보려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위안을 주는 대중 매체에 몰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균열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모든 노력들은 갈라진 틈을 메우기보다는

금이 간 부분에 얇은 스카치테이프를 붙인 임시방편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틈새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각하기 싫어서 발버둥 쳤던 거지요.


초긍정의 단어로 얼마간 나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갈라진 감각과 충돌하는 가치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

괜찮다는 말로 틈새를 덮었으니 무기력과 우울이라는 부작용이 날 만도 하지요.


결국 제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긍정이 아니라

더 느린 시선이었습니다.


제 안의 갈라짐을 들여다볼 용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만들어졌습니다.


나를 재촉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서둘러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를 회복하기 위해 서둘러 치유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천천히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단어들로 나를 채워야만 했습니다.

단정하지 않은 단어,

나를 설득하지 않는 문장,

쉽게 희망으로 도약하지 않는 태도였지요.


사람들은 그걸 침묵이라고 일컫기도 하더군요.


그때 다시 만난 책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였습니다.


몇 년 전에 읽을 때는

아리송한 느낌으로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상태를

세밀하고 치밀하게 설명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위로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문단 문단 사이의 빈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무언의 빈칸이 필요했던 겁니다.

괴랄하게 호들갑 떨며 광대처럼 살아온 제 자신에 헛웃음이 나오더군요.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는

의미 없이 돌을 밀고 부조리를 제거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달콤한 긍정도, 구원의 약속도 없지만

도망치지 않겠다는 태도는 굳건하죠.


괜찮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모습에,

저는 글쓰기의 새로운 기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줄리아 캐머린의 <아티스트 웨이>에서

창조성을 방해하는 존재를 내면의 검열관이라고 부릅니다.


첫 소설을 완결하고 글쓰기가 어려웠던 이유가

제 안의 창조를 이뤄내는 운영자와 비판과 부정으로 가득한 검열관과의 싸움으로

무척이나 지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홀리듯 제 안의 운영자에게 운전대를 잡게 하여 글을 썼고

나중에 운전석에 앉은 검열관으로 인해 괴리가 생겼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운 좋게 출간 계약을 맺게 되어 편집자와 상의를 하고 수정을 반복하면서

제 안의 검열관이 운전석에 앉아 저를 마구 괴롭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초긍정의 언어들로 운영자를 살살 꼬셔 운전대에 다시 앉히려고 노력했지만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작년의 일기를 보면

서로 운전대에 앉으려고 싸우는 운영자와 검열관 사이에서

매우 지쳐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기의 대부분이 처음에는 글이 엉망이라고 시작하고

끝에는 그래도 계속해나가면 된다고 위로하며 끝이 납니다.


피 튀기는 내면의 치열한 싸움을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말수도 적어지고

바깥출입도 제한하는 제 무기력한 상태를 쉬운 언어로 설명해보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시키기가 힘든 겁니다.


혼자 있다는 사실은 결핍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혼자만의 시간 덕분에 저 자신의 리듬을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걸 고독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현재 제 상태는

검열관을 살살 다독여 조수석에 앉혀놓은 상태입니다.


끝없이 떠오르는 질문의 답을 찾아

철학, 역사를 공부하면서

오랫동안 사회 속에 박힌 구조를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제 안의 검열자가 제가 받은 교육과 환경에 영향을 받았으며

해맑고 철없는 운영자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죠.


그러고 나니

글쓰기에도 재미가 붙고

글쓰기 능력을 빨리 향상하고 싶은 조급한 마음도 가라앉았습니다.


무엇보다 글쓰기로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무언가가 될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되어 기쁩니다.


지금은 술도 전혀 마시고 싶지 않고

저를 탐구하는 버거운 시간을 단순 쾌락을 주는 대중 매체로서 허비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침묵으로 바라봐주고 무언의 위로를 건네준 당신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도 빈칸처럼 평온한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추신> 글쓰기를 세상을 바라보는 탐험의 도구로서 이용하려고 하니 마음이 가볍습니다.

당신의 마음도 가벼워지길 바라며 꿈에서 본 제 마음 가짐을 시로 써서 전합니다.



<아이와 범고래>- 윰세


너는 범고래의 형상으로 내게 다가왔지.

날 잡아먹을 듯 활짝 웃는 아이처럼 입을 벌렸어.

하얀 미역처럼 흐물거리며 도망가는 종이를 잡으려 허우적대는 내 모습이 우스웠니?


난 어떤 아이에게 종이를 건네려 했어.

아이가 누군가에게 글로 써서 무언가를 전해야 했거든.

뭘 쓰려했는지 나도 몰라.


범고래야, 네가 무서웠다고 솔직하게 말할게.

날 비웃으러 다시 와줄 거니?

이제는 잡아먹혀도 무서워하지 않을래.


왜냐하면 난 아이에게 계속 종이를 건넬 거고

아이는 시시한 무언가를 쓸 테고

난 그걸로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