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번째 편지
저번 편지에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라는 시를 소개한 걸 기억하시죠?
저는 아침마다 메리 올리버의 시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그저 너의 몸이라는 여린 동물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게 하면 돼.‘라는 문장이 제게는 커다란 힘을 줍니다.
내면을 탐구하며 글을 쓰는 제게는 특히나 그렇습니다.
‘여성’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오래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프레임인지 생각하는 와중에 저를 찾아온 책이 있습니다.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입니다.
매체에서 비추는 위험하고 인간을 위협하는 늑대라는 프레임처럼 여성도 고정된 프레임 안에 갇혀 질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심리 분석 전문가인 에스테스는 여성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존재이며 다치거나 좌절해도 자신의 본연의 야성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강해질 수 있다고 고전 이야기를 여성의 관점으로 해석하며 위로합니다.
어젯밤에 책을 읽고 나체로 자유롭게 수영을 하는 꿈을 꿨습니다.
여성의 야성성을 불러와야 한다는 책의 내용이 세상의 시선과 평가를 내던지고 자유롭고 싶은 저의 내면을 자극한 모양입니다.
여성이라는 프레임은 단순한 성별 구분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해 온 역할과 태도, 몸의 사용 방식까지 함께 담고 있습니다.
남성 중심의 서양 철학이 기초가 되어 일구어진 현대 사회에서 여성은 사유하는 주체라기보다 자연과 육체, 재생산의 영역에 가까운 존재로 분류되었습니다.
고대 철학에서 이성과 판단, 질서를 세우는 능력은 남성의 것으로 간주되었고 반면 여성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몸, 즉 매개체로서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 결과 여성의 권위는 아들을 낳아 가문을 잇거나, 친정의 부와 혈통을 전달할 때만 권위를 세울 수 있었지요.
이 구조는 시대가 바뀌어 형태를 달리했을 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가부장적인 권위가 노골적으로 작동해 여성의 삶을 직접 제한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훨씬 부드럽고 세련되게 여성을 옥죄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겉으로는 선택지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외모라는 기준이 강력하고 작동하고 있지요.
여성의 외모가 상황 평준화된 것은 모두가 더 높은 기준에 끊임없이 자신을 맞추게 되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 나이보다 어려 보이려 애쓰거나 입술에 필러를 넣어서 점점 더 두툼하게 하거나 손톱을 길게 기르고 화려한 장식을 하지 않으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느끼는 여성 속에서의 편견이 그러합니다.
저도 반짝반짝 화려한 네일 장식에 한창 열을 올렸고 손톱이 견뎌내지 못해 그만두었지요.
문제는 여성을 평가하는 외모의 기준이 끝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쇼츠에서 두 여성이 경쟁적으로 커지는 링 귀걸이, 점점 길어지는 속눈썹과 손톱을 자랑하는 동영상이 떠오릅니다.
도달해도 안심할 수 없고, 잠시 만족하는 순간에도 더 높은 기준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는 명확한 억압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억압은 타인의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으로 이동해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검열하기 때문이겠지요.
아이돌을 추앙하는 연예 사업이 발달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 현상이 특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오락을 넘어, 미적 기준을 생산하고 확신하는 핵심 장치가 되었지요.
이른 나이에 강한 속도로 외무 지상주의가 주입되는 현상이 걱정됩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니? “라는 질문을 받기도 전에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하게 만드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자신의 감각과 욕망, 생각을 탐색할 시간을 주어지기도 전에 여자 아이들은 이상적인 아이돌을 닮고자 살을 빼고 화장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연스럽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기보다 끊임없이 손봐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검열을 필수로 살아가는 여성 속의 프레임이 남녀 간의 연애를 다루는 매체 속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성은 감정적이고 까다로운 인물로 등장합니다.
요구는 많고, 기분에 따라 기준이 바뀌고, 남자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골치 아픈 존재로 그려지며 중세 시대의 마녀로 재탄생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겉으로 보면 여성이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남자를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여성이라는 갑갑한 프레임 안에서 허용된 가장 왜곡된 반항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과거의 제 자신이 내면의 심리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연애할 때 늘 갑갑하다는 느낌을 받은 모양입니다.
오랫동안 사회는 합리적 기준 설정과 규칙 제정을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왔고 여성은 감정적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명확한 요구와 계약의 언어를 사용할 연습이 턱없이 부족했지요.
그 결과 여성이 기준을 세우려 할 때 허용된 방식인 감정, 기분, 눈치, 암묵적인 시험 같은 비공식적인 방법을 강화했을 겁니다.
매체 속 ‘까다로운 여자’는 여자의 본성이 아니라. 여성 프레임 안에서만 가능한 왜곡된 권력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연애 방식은 해방이 아니라 소모로 이어지고 아무리 많은 요구를 해도 관계의 규칙 자체를 다시 쓰지 못하고 파탄이 나고 말지요.
그래서 많은 연인들이 연애를 하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성이 관계 간의 권력을 애쓰고 주장했음에도, 주체로 서 있다는 감각은 쉬이 오지 않기 때문이죠.
여성의 권력을 재생산하려는 자기 나름의 노력이 남성의 기준에서는 귀여운 앙탈과 변덕쯤으로 치부되기 쉬우니까요.
한때 저 역시 프레임 안에서 저를 소모시켰고 여전히 프레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가 간신히 나오기를 반복하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위해 쏟은 에너지를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평가와 비교,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에 지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않는지
저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면 지금보다 풍족한 내면을 가꿀 수 있었을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인간관계에서 변덕과 요구, 비교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함께하는 시간을 오롯이 즐겼을 것 같습니다.
프레임을 인식하고 나니 자유로움과 함께 고독감도 찾아오더군요.
고독은 공허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의 어색함과 놀라움이겠지요.
글쓰기를 하면서 저는 내면의 야성을 깨우고 있습니다.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도 제 고독을 타인에게 공유하기에는 글쓰기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글쓰기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프레임 안에서 갑갑하게 살아온 나날들을 돌아볼 수 있는 노년기를 맞은 당신께서는 어떤 자유로움과 고독을 느꼈는지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저의 다음 단계의 글이 될 수도 있겠지요.
늑대처럼 야성적이고 자유로운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추신> 메리 올리버의 시들에 감명을 받고 저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시를 소개해드립니다.
<그래도 돼>. -윰세
나 자신으로 있을 때‘
세상에 태어난 쓸모를 다하는 거라고 믿어도 돼
무엇이든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온몸을 맡겨도 돼
나는 나로서 살아가면 돼
나라는 존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걸 찾으면 돼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을 즐기면 돼
그리고 끝내 찾지 못해도 돼
눈을 감는 날
참 즐거운 생이었어하고 말하면 돼
허허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면 돼
그냥 그러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