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편지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어보라고 귀가 아프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회 속의 개인이라는 사유부터 시작하는 책을 억지로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저는 사랑에 관한 질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지루한 사회과학 책으로만 느껴졌지요.
시간이 지나, 다시 제 손에 들어왔을 때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제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정확한 짚어주어, 마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긁어주는 느낌이 들었지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대학 시절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너 자신을 사랑해라’였다는 걸 말이지요.
단순한 조언 대신 사회 구조를 파악하여 정제된 언어로 이해를 돕는 <사랑의 기술>을 읽어봐라 말씀하신 거였지요.
참으로 교수님 다운 조언이었죠?
<사랑의 기술>에서는 진정한 사랑은 타인을 붙잡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붙잡는 기술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프롬이 말하는 자기 사랑은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책임지는 태도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를 지닙니다.
자신을 존중하고 책임지는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타인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은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돌보며, 자기 삶의 중심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기술>에서의 자기 사랑의 출발점이지요.
<사랑의 기술>에서 제가 좋아하는 부분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사랑의 능력은 긴장, 각성, 고양된 생명력의 상태를 요구한다.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프롬이 말하는 자아도취란, 세계와 타인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의 투사물로만 보는 상태입니다.
이때 ‘객관성‘은 단순히 냉정함이 아니라 타인을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는 능력과 나의 욕망과 두려움이 만든 상과 실제 대상을 구분하는 힘입니다.
<사랑의 기술>을 읽으면 자연히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손이 가게 됩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면 믿으시겠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펼쳐보면 아래처럼 밑줄과 이해를 위한 메모가 쓰여있습니다.
읽히지 않으면 멈췄다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책이 한 번에 술술 읽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떠오르는 각종 질문의 답을 찾다 보니 서서히 에리히 프롬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고가 갖춰지게 된 겁니다.
책을 완전히 파악했다기보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고개를 끄덕인 구절을 보여드립니다.
제가 단순쾌락을 주는 대중매체에 몰입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감정은 전반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창의적 사고가 감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감정 없이 생각하고 감정 없이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인 것이 불안정하거나 정신적으로 불균형한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렸다.
이 기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인은 매우 약해졌다.
그의 생각은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졌다.
한편 감정은 완전히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인격의 지적인 측면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 결과는 값싸고 가식적인 감상성인데, 이 감상성을 가지고 영화와 대중가요는 감정에 굶주린 수백만 명의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우리는 자유를 가진 것처럼 살아가지만, 실은 매 순간 사회적 요구와 타인의 기대에 억눌려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유는 축복이자 부담이고,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권위에 의지하거나, 파괴적 충동에 몰입하거나, 혹은 맹목적 순응에 도피한다고 합니다.
저번 편지에서 제가 초긍정 언어에 잠시 마음을 의지했다는 말을 기억하시죠?
그 언어들은 저를 지켜주는 방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유의 부담을 미루는 장치였을지도 모릅니다.
자유의 부담과 책임을 차근차근 견딜 힘을 키워야 하는데 에리히 프롬은 그 힘이 자기 사랑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자기 사랑은 단순한 문장으로 위로받는 것에서 나오는 건 아니겠지요.
스스로를 마주하고, 내 안의 괴리와 불안을 이해하며, 책임 있는 선택을 해나가는 능력입니다.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압력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중심을 세워야 하겠지요.
자기중심을 잡는 능력은 단번에 생기는 건 아닙니다.
매일 작은 선택과 자기 성찰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유의 무게를 견딜 힘이 쌓이게 됩니다.
자유와 사랑, 자기 자신과 사회 사이의 균형은 자기를 지탱하는 힘에서 나오는 거겠지요.
자기 사랑은 타고나는 감정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태도이고, 매일 연습해야 하는 능력인 겁니다.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거겠지요.
저는 사회라는 거대한 폭풍우 앞에서 나만의 닻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자유의 무게를 견딜 힘을 기르려 노력하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도 사랑의 기술을 한껏 발휘한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추신> 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쓴 시를 보여드립니다.
<그림자>. -윰세
멀리보는 법을 조금씩 깨우쳤을 때
앞서가는 그림자를 보게 되었네.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뒤에 있는 나를 너그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네.
해가 저물어가도록
멀어지는 그림자를 붙잡으려 달음박질 쳤네.
그러다가
내 그림자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멈췄네.
앞서가는 그림자는 점점 멀어지고
어둠 속에 사라져버렸네.
주저 앉아 숨을 돌리는데
웅크린 내 그림자가 말을 거네.
놓치지 않았어.
여기에 있어.
사라진 내 그림자를 바라만 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네.
어둠은 점점 커져가고
밤새도록 그림자와 함께 앉아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