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편지
타인을 향한 분노가 다시 제 자신에게 돌아오며 마음이 힘든 때가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저를 좀 먹어가고 있었지요.
생각이라는 것이 감정에 지배되면,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되면 나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게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깨끗한 물에 구정물이 한 방울이 섞이면 너무나도 쉽게 탁해지는 것처럼 제 마음과 머리가 분노로 검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속이 활활 타들어가는 들어가는 듯한 분노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서 나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분노를 놓아주려 애쓰게 되었지요.
그런 때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게 되었습니다.
https://youtu.be/6J8_myitR2s?si=RgKB5JNUaQONUyjk
워낙 유명한 곡이라 전에도 여러 번 들었으나, 마음을 바꿔먹고 들으니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로웠습니다.
조급하고 우울하고 슬프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 제 마음을 현란한 연주로서 세심하게 읽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연주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순간 잔잔하면서도 환희에 찬 연주에,
작곡가도 분노에 힘들어했으며 마침내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듣고 또 듣고를 반복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음악이 주는 위로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요.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진정으로 좋아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클래식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클래식에 관한 지식의 폭이 넓어졌거나 전문가처럼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핸드폰만 있으면 좋아하는 클래식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는 걸 알려드리려 하는 겁니다.
제게 행복을 안겨 준 클래식 중 하나를 더 예로 들자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https://youtu.be/hMGIncslU6g?si=1T6JRtITdN--MDD0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너무 좋아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 더듬더듬 서툰 연주를 해보기도 합니다.
물론 남이 듣기에 엉망진창이지만요.
하지만 당신께서는 ‘잘한다. 잘한다.‘ 하며 절 응원해주시겠지요?
운이 좋게도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관람객들 중에 신부님과 수녀님의 모습도 많이 보였고 3층 객석까지 빈자리 없이 꽉 차있었습니다.
이런 말이 좀 우스울 수 있겠으나 그의 아름다운 연주에 나쁜 것이 제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검은 물체가 다급하게 달아나는 환시까지 보였습니다.
아름답고 신성한 연주에 삿된 것들이 모두 달아나겠다는 생각으로 빚어진 제 착각이겠지요.
부드러운 선율의 아리아로 시작해 한음이라도 틀리면 절대로 안 되는 치밀한 연주에서 다시 아리아로 끝맺음을 하는 골드베르크 곡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 애썼기에 맨 처음의 편안함보다 훨씬 더 나은 편안함에 이를 수 있다.‘
글을 쓸수록 제 자신을 파고들어 갈수록 음악을 비롯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저에게 선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선물의 의미를 알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익숙한 것을 새로 발견하는 기쁨을 매일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선호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살펴보면 치열한 자기 와의 싸움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괴롭고 힘들더라도 언젠가 끝이 있고 모든 게 괜찮다고 위로하는 것들이 많더군요.
어떤 예술적인 것을 접했을 때. 얼마나 나 자신을 얼마나 깊숙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느냐에 따라 깊이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유명한 클래식에 점점 심취하게 되는 건 음악으로 건네는 작곡가의 언어가 이제야 어렴풋이 들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걸 포용하는 듯하면서도 작곡가의 생각과 주제를 무언의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도 제가 좋아하는 클래식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니다.
‘괜찮아. 지금 편안하지 않아도 언젠가 편안함에 이르게 될 거야. 그리고 난 이미 편안하다.’
저는 이렇듯 새로운 세계에서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도 오늘 평안한 하루를 보내시길 빌며 이만 줄입니다.
-편안함을 향해 발을 떼기 시작한 초보 여행자 윰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