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지
저는 당신의 웃는 얼굴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시답잖은 말을 재잘거리며 당신을 재밌게 해 주려고 노력하곤 했지요.
재밌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당신께 전달하며 정작 제가 웃느라 제대로 이야기를 못하는 건 다반사지만요.
재미가 없는 건 물론이고 실속도 하나 없는 푼수짓을 해대는 제게 한심하다는 눈빛 대신 귀엽다는 듯 웃어 주시는 게 속없이 좋았습니다.
누군가에게 귀여움을 받는다는 느낌은 맛있다고 소문난 디저트보다 달콤한 맛이니까요.
그래서 당신의 웃음을 끌어내고 싶어 지은 시를 조심스레 전해보려고 합니다.
[진지 드세요.
나는 고개를 젓는다.
유머를 주세요.
뒤통수에 벼락같은 통증과 함께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퍼드세요.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내가 말한다.
숟가락 주세요.
딱, 하고 이마에 붉고 동그란 자국이 새겨진다.]
하하하.
어쩐지 당신께서 저 몰래 혀를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제가 얼마나 재미없는 사람인지 당신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얼마나 유머감각을 가지고 싶은지 요즘 웃긴 꿈을 자주 꾸는데 막상 글로 적으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유머 감각과 융통성을 갖추고 싶어 안달하는 제게 당신께서는 ‘그냥 너답게 하면 된다.‘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당신의 따뜻한 조언에 저는 두 개의 책을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잔인한 폭력과 무고한 희생을 빌리라는 인물로 풍자한 커트 보니것의 <제5 도살장>과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첫 번째 아내와의 궁핍하지만 소박한 행복을 느끼는 결혼 생활과 작가로서의 고뇌가 담긴 일기를 엮은 책 <내가 사랑한 파리>입니다.
<제5도살장>은 생존 확률이 가장 희박했던 빌리가 마지막까지 생존하는 이야기로 정신을 쏙 빼놓는 훌륭한 소설입니다.
소설 속 우스꽝스러운 광대 같은 빌리가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무기력함, 트라우마에 잠식된 생존자와
슬퍼도 애써 미소 지으며 담담한 척 살아내야 하는 전쟁 후의 남겨진 세대를 대변한다고 느꼈습니다.
독특한 유머를 갖춘 작가가 쓴 슬프디 슬픈 희곡에 감탄하며 당신 말씀대로 오로지 저만의 것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지요.
<내가 사랑한 파리>라는 헤밍웨이의 일기 속 일화에 맞춤법이 엉망이라 그가 받은 편지에 제대로 된 헤밍웨이의 스펠링을 쓴 적이 없다는,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나옵니다.
친구인 스콧 피츠제럴드의 자동차를 함께 가지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아 먼저 목적지를 향하며 그가 올 거라 믿을 때도,
그를 애타게 기다리며 아내와의 여행을 위해 살뜰히 모아둔 돈을 허무하게 써버릴 때도,
느지막이 나타난 친구와 함께 드디어 자동차를 가지러 갔으나 하필이면 천장이 없는 차라서 비를 홀딱 맞으며 돌아갈 때도,
미열에 곧 죽을 사람처럼 목욕물을 재는 체온계라도 구해오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친구를 볼 때 등등
헤밍웨이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덤덤하게 그 상황을 서술합니다.
세 쪽이 넘어가는 객관적인 서술에 저는 어느 순간 빵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 하나 없이도 헤밍웨이의 황당하다 못해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심정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손이 많이 가는 헤밍웨이의 친구와의 일화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읽으며 깔깔거리던 저는,
헤밍웨이가 위대한 작가라는 걸 다시금 느끼기도 했고 웃음을 주는 방식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전히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고 제 안에 있는 걸 꺼내보면 온통 어둡고 무거운 것들 뿐이니 걱정입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영차영차하며 꺼내다 보면 가볍고 산뜻해진 마음속에 저만의 유머를 발견하는 날이 오게 되겠지요.
그걸 찾으면 제일 먼저 당신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제게 당신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예상이 됩니다.
‘그래, 얘. 혼자만 재밌지 말고 나도 좀 같이 웃어 보자.‘
그래서 재롱부리는 시를 하나 더 보여드리며 이만 줄이려고 합니다.
[라이터(Writer)로서
라이터(Lighter)가 부럽다.
부싯돌을 가볍게 돌리면
번쩍번쩍 불이 나오니.
내 머리를 살살 긁으며
팍팍 글이 튀어나왔으면.]
-푼수 윰세 올림.
추신) 억지로 웃는 것도 뇌에서는 웃었다고 착각해 좋은 호르몬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론 시답잖은 저의 편지를 보고 억지로 웃어달라는 건 아닙니다.
정말로요.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