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편지
당신께서는 모든 계절이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저는 무척이나 싫어하던 겨울이라는 계절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가을만 돼도 발이 시려서 어쩔 줄을 모르나, 날이 쌀쌀해지면 눈이 일찍 떠지고 새벽의 찬바람을 느끼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향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달리기로 열이 나면 바로 식혀주는 찬바람이 좋아서 일 수도 있고 낮은 기온에 산소포화도가 높고 미세 먼지가 적어서 상쾌함을 느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한 새벽시간은 나의 규칙적인 발소리와 가빠지는 숨소리에 집중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보통 삼 킬로미터 정도를 달리는데 ‘나는 러너다.‘라고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짧은 거리이나 제게는 그만 달리고 걷자는 마음속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점이기도 합니다.
힘들다는 몸의 반응과 마음속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더 빨리 달리거나 더 오래 달리면 나를 이겼다는 뿌듯함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팽팽한 긴장이 발끝부터 복부, 가슴, 그리고 머리끝까지 올라올 때, 제 흐트러진 마음을 꽉 조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러너를 보면 속으로 응원을 보내는데 신기하게도 땀을 흠뻑 흘리며 숨이 차도록 달리는 분의 옆을 지나칠 때 상쾌한 에너지가 전해지는 날도 있습니다.
먹이를 구하러 나온 왜가리를 만는 날도 있는데 행운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달리기 후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날이면 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지요.
딱딱해진 종아리를 살살 주무르며 네가 참 애쓴다고 말하며 위로하기도 합니다.
이런 제게 당신께서는 ‘넌 참 좋은 것도 많다.‘ 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제게 좋은 것을 찾느라 혈안이 된 상태입니다.
남은 생애 동안 제게 건강한 기쁨을 주는 일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기로 결심했거든요.
예전에 제가 얼마나 걱정도 많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아이였는지 잘 아시지요?
우로보로스라는 꼬리를 먹는 동시에 재생하는 뱀의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한한 순환이며 완전함을 상징한다는 뱀이 고통, 분노, 절망의 몸뚱이를 끊임없이 삼키고 또다시 재생하며 괴로워하는 제 자신처럼 보이더군요.
그래서 좋은 것으로 무한한 순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를 바꾸자고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달리기도 함께 시작했습니다.
달리기는 부정적인 생각에 자꾸 빠져 쓰러지는 절 일으켜 주기도 하고 채찍질해주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좋은 생각이 도저히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아 달리기 내내 긍정 확언을 들으며 억지로 주입하던 때도 있었지요.
그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을 파고드는 부정적인 감정에게 보내는 짧을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 내 머릿속에 하루종일 머무는 너에게 셀 수 없는 작별 인사를 한다.
이제 안녕.
오늘도 너는 내게 말을 건다.
잘 가. 안녕.
매일매일 작별 인사를 건네도 자꾸 나타나는 너.
부디 이제는 정말 안녕!]
글을 볼 때마다 그때의 절 떠올리며 픽하고 웃게 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던 나날들을 돌이켜봤을 때, 사실 그건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습니다.
마음속의 고요를 가지려면 날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되는데 뭘 그리 애썼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뭐든 애쓰고 해볼 건 다 해 봤으니 약간은 달라진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제가 매일 빼놓지 않고 하는 건 .‘오늘이 내가 가장 아름답고 젊은 날이다.‘하고 거울을 보며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뇌면 어떤 날은 옷장 안의 예쁜 옷을 골라 입게 되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게 되기도 합니다.
요즘 좋아하는 음식은 닭가슴살을 소금물에 한시간 담궈 염지하고 오븐에 구워서 데친 시금치와 함께 마요네즈와 홀그레인 머스타드 소스를 바른 빵에 올려 먹는 겁니다.
당신께 편지를 마무리하고 만족스러운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닭가슴살을 오븐에 넣고 구울 예정입니다.
이렇듯 전보다는 즐거운 제가 있습니다.
저번 편지에 속상한 마음만 표현한 것 같아 이번 편지는 제가 즐겁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달리기 후에 가벼워진 몸으로 상쾌한 기분이 당신께 전달되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고 평안하십시오.
- 왕초보 러너 윰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