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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May 20. 2021

우리에게도 권태기가 있었다

주말 저녁 갑자기 남편이 면도를 한다. “여보, 왜 면도해? 어디가?” 한참 씻더니 옷도 잘 차려입는다.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낯간지러운 대답에 나는 ‘면도 안 해도 잘생겼다’라며 한 술 더 뜬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회사에 가면 보고 싶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올해로 13년째 만나고 있지만, 매년 이 사람이 더 좋아진다. 최고의 룸메이트이자 가장 친한 친구. 하지만 이런 우리에게도 권태기가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권태기가 찾아왔었다.


만난 지 4년째, 1년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해였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나를 기다렸던 연인과 매일 붙어 다녀도 모자랄 텐데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은 냉랭했다. 재미있는 영화를 봐도 재미가 없었고, 손을 잡아도 시들했다. 시큰둥한 표정도, 말투도 감춰지지 않았다. 차갑게 대하고 나면 미안한 마음에 잠깐 잘해줬지만 한때뿐이었다. 좋은 사람인데,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한 시간을 돌아보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애써도 좋아하는 마음은 만들어낼 수 없었다.


나의 짜증이나 무심함에도 그는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맞받아치면 싸우기라도 하겠는데 상처 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더 잘해주겠다고 말하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가 나에게 보여주는 한결같은 사랑은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내가 문제라는 생각에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렇게 계속 만나도 되나 싶었지만 함께한 시간을 생각하면 헤어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마 견디지 못하고, 당신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던 날, 나를 구해준 건 ‘권태기’라는 단어였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이라고 하던가. 누군가가 처음 마음에 들어왔을 때의 설렘,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는 불안, 연인으로서의 기대, 안정과 갈등, 익숙함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특별한 시간도 일상이 된다. 그렇게 일상이 반복되고 나면 만남이 시들해지고 싫증을 느끼게 되는 시기가 찾아오는데, 이를 권태기라고 한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본 ‘권태기’라는 단어는 나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적어도 나에게만 이런 마음의 문제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과 누구를 만나든 한 번쯤은 권태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의 괴로움이 평범하게 느껴졌다.


“나 권태기인가 봐!” 신나는 목소리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제를 인식하고 나니 더는 괴롭지 않았다.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면 권태기도 같이 넘어야 할 산이 아니겠는가. 그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또 겪어야 할 일이다. 내 설명을 듣고 나서 그는 비슷한 데이트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나는 더 이상 지루함에 매몰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복학 후 대학 4학년 되어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시작한 것도 관계에 큰 도움이 됐다. 자소서, 면접 등 매일 나를 증명해 내야 하는 더 큰 변화 앞에서 연애 감정(?)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한결같이 옆에 있어 준 그가 큰 위로와 의지가 됐다.


싫은 게 아니라면 계속 만나보라는 친구의 조언도 생각난다. 그렇다. 결혼을 하고 보니 좋은 걸 많이 해주는 사람보다 싫은 걸 안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아니 지금은 단순히 싫은 사람을 피한 정도가 아니다. 그때 잠시 식어버린 마음을 외면하고 보석 같은 사람을 놓치지 않은 나를 칭찬하고 싶다.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고 자주 고백한다. 권태의 위기를 넘긴 감정은 오래 달궈진 구들처럼 이제는 어지간한 일에도 변함이 없다. 그저 은은히 마음을 데울 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별을 통보하는 은수에게 상우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모두 영원한 사랑을 기대하고 약속하지만 사랑은 변한다. 하지만 사랑이 변한다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연애 초의 설레는 사랑을 평생 지속할 수는 없다. 두근거림의 사랑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받아주는 사랑으로, 눈만 마주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사랑으로 변해간다. 그 과정에서 지루함이나 권태의 터널을 통과하기도 한다. 혹시 지금 권태기를 보내며 맞잡은 손이 차갑게만 느껴진다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나에게서, 그에게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이내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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