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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포 Aug 04. 2021

익숙하고 낯선 고로케님께

고로케님, 안녕하세요.


요즘 날씨가 참 덥네요.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창문을 닫고 있는 것이 바깥바람보다 훨씬 시원할 지경입니다. 아침에 기진맥진해서 엘리베이터에 타던 고로케님 생각이 납니다. 저한테 '안 더우세요?'라고 물어보셨는데 제가 '하하. 더워요'라고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해서 고개를 갸우뚱하셨었죠. 더위를 많이 타시는 것 같던데 요새 괜찮으시려나요?


여름에 이런 소리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겨울이 더 좋아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마음이 설레더라고요. 겨울이라는 계절은 왠지 마지막인 느낌이잖아요. 한 해 동안 애쓰고 지지고 볶았던 시간들을 갈무리하고 쉬는 느낌이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폐가 얼어붙을 것 같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더 생생하게 나기도 하고요. 제일 좋아하는 시 중 하나도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네요. 신경림 시인의 ‘정월의 노래’라는 시인데요. 가장 마지막 구절이 좋아요.

눈에 덮여도
먼동은 터오고
바람이 맵찰수록
숨결은 더 뜨겁다

공기까지 얼어붙는 수개월간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죽은 것처럼 어떻게든 웅크리고 버텨내잖아요. 인생에 겨울같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돼요. 잎이 다 떨어진 나무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초라하지만 매일을 살아가는 것. 제일 많이 껴입고 있지만 가장 벌거벗은 것 같은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겨울이 좋은 만큼 봄은 별로예요. 봄에는 뭔가 시작해야 하는 피곤함, 모두가 행복해야 할 것 같은 밝은 기운이 있어서요. 어느 히어로물에 나오는 빌런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겨울은 모두 불행한 것 같아서 내 불행이 좀 가려지는데, 봄은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한 것 같아서 화가 나더라고요. 취업 준비하던 때 이런 생각을 한 이후로 매년 봄만 되면 싱숭생숭합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도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아요. 3월이면 개학이잖아요. 1월은 방학인데, 봄이 오는 3월은 진짜 1년의 시작인거죠. 물론 꽃이 피고, 나무에 싹이 나는 모습이 신기하고 때때로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겨울이 지나간 아쉬움이 더 큽니다.


여름은 그냥 견디는 계절이에요. 아가미가 돋을 것 같은 습기라든가, 땀이 나서 머리카락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여름이었다—’만 붙이면 갑자기 청춘 소설로 변하는 감성적인 느낌의 계절도 아닙니다. 휴가라든가 피서의 신나는 느낌도 아니에요. 더위를 빼면 특별히 무감각한 계절. 아마 저는 여름 통점도, 겨울 통점도 강한 모양입니다. 에어컨 앞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하는 얘기라 제 스스로도 정말 그런가 의문이 들긴 하지만요.


고로케님과 인사를 나눈 지도 어느덧 3년째지만, 고로케님이 더위를 싫어한다는 것 말고는 제가 직접 아는 게 없더라고요. 고로케님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유쾌한 그림, 담담한 글을 보면서 유추할 뿐입니다. 생각해보니 일단 고로케님이 왜 고로케인지도 모르고 있네요. 고로케를 좋아하셔서인가요? 그렇다면 어떤 고로케를 좋아하시나요? 갑자기 감자 고로케가 먹고 싶어 졌어요. 저희 집 바로 옆에 경성핫도그가 있거든요. 요새 위가 좋지 않아 튀긴 음식을 자제하고 있어서 참아야겠지만, 이 편지를 다 쓸 때까지 고로케님을 부를 때마다 감자고로케의 충동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에이포가 된 과정은 고로케님께서 잘 알고 계실 거예요. A4 한 장에 들어갈 분량의 글을 꾸준히 쓰고 싶다는 마음에 '에이포'라는 필명과 '자, 이 글(this writing)'이라는 뜻의 ‘자이글'이라는 필명을 고민했었어요. 고로케님은 자이글에 한 표를 던지시면서 '에이포'가 아이돌 그룹 이름 같다고 하셨는데 기억나세요? 고로케님 이야기에 혼자서 '에이~포예요!'하고 아이돌 인사를 하며 낄낄거렸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이 나중에 유명해지면 그릴 제품 '자이글'과 상표권 분쟁이 있을까 봐(하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에이포를 골랐어요. 금방 유명해지지는 않을 테니 당분간 필명에 대한 고민을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요.


이번에 고로케님께 편지를 쓰면서 고로케님의 지난 글들을 읽어봤습니다. 전에도 얼마든지 읽을  있었지만 왠지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서 망설였거든요. 일단 읽자마자 댓글을 달고 싶은 충동이 들었습니다. ‘무서운 중독 읽으면서 제가 좋아하는 웹툰을 우와아앙 추천하고 싶었고, 주말에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저도  주째 다짐만 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감자! 귀여운 댕댕이 이야기를 하면 정말 끝도 없이   있잖아요. 저희 엄마 집에 두고  막내 있거든요. , 원서는 어떤 연유에서 읽고 계신지, 퍼포먼스 마케팅의 괴로움은 무엇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대답을 듣고 싶다거나 고로케님이 쓴 이야기를 주제로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럼 좀 쑥스럽잖아요. 그냥 고로케님을 조금 더 알아가고 싶다는 말입니다. 코로나19 때문에 같이 하기로 한 식사를 무기한 미루게 아쉽다는 말을 좀 길게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계절 얘기를 저렇게 길게 한 것도 사실은 어색한 사람과 시답잖은 날씨 얘기를 하는 것과 같은 거죠.


고로케님, 다행히 아직까지 저는 감자고로케를 먹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기 전에 편지를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음 주가 말복이라는데, 아무쪼록 건강하시기를 바랄게요.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감자고로케 대신 양배추즙을 집어 들며

에이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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