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건축가 Jan 21. 2024

조근하던 날

한낮에도 열이 40.4도를 찍던 아이를 옆에 뉘이고 글을 쓴다. 시작은 내가 조근하던 날이었다.


야근을 해야 했다. 사수가 내게 다음 주 월요일 마감인 일을 주면서 일차 마감이니 대충 해도 된다고 했는데, 피드백의 수준은 대충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너무 졸렸고 아이들을 재우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새벽, 아이가 부르는 소리에 깨서는 다시 잠에 들 수 없어 한 시간 조근을 했다. 그리고 조근한 딱 그 시간만큼 조퇴를 했다. 아이 열이 39.2도라는 유치원 전화를 받았기 때문.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민이는 신기하게 꼭 목요일에 아프기 시작한다. 금요일엔 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게 분명하다. 금요일은 율이 발레 수업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 발레 수업이 끝나면 베프인 C와 함께 플레이 데이트를 하고, 그곳이 어디든 저녁까지 해결한다.


C와 율이는 유치원에서 만났다. 2020년 2월에 새 유치원으로 옮긴 율이는 입학과 동시에 코비드 락다운을 맞았다. 그 시기 독일 유치원은 맞벌이 부모와, 사회기반시설에서 일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긴급보육을 했다. C의 엄마는 그 당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C는 유치원에 오지 않았다. 동네 유치원 친구 치고는 집도 서로 반대편에 있었는데, C네는 종종 우리 집 근처의 놀이터로 놀러 오곤 했다. 그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통성명을 했고, 어느 날 우리 집 우편함에는 우표가 붙어있지 않은 C의 생일파티 초대장이 들어있었다.


C가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 준 덕분에 둘은 친구가 되었고, C의 엄마인 R과 나 역시 곧 가까워졌다. 수다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지는 않지만, 서로의 집에서 아이들을 픽업할 때 현관문에 기대어, 아이들 발레를 보내고 장 보러 가는 길 위에서, 수영 수업에 들여보내고 아이들 옷을 정리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율이가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유치원보다 빨라진 하교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 사이에서 사라진 나의 한 시간을 알아채주고 물어봐 준 것도 R이었고, 언어에서 기인한 나의 낮은 자존감 때문에 무례한 대응을 할 때에 가만히 기다려준 것도 그였다.


이제는 학교도, 학년도 다르지만 둘이 만나면 여전히 방으로 금세 사라진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율이가 C네로 놀러 갔다가 자고 왔다. 이번주는 우리 집 차례였지만 아픈 민이 때문에 너희 집에서 놀아도 되겠냐고 R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자기가 안 그래도 그러자고 물어보려 했다고. 다음 주 금요일에 자기가 1박 2일로 세미나를 가서 집에 없고 남편은 늦게 들어와서 우리 집에서 재워주면 좋겠다고.


순간 따뜻해졌다. 우리가 서로의 일을 위해 자기 아이를 맡길 수 있을 만큼의 거리 안으로 들어왔구나. 도움을 청한 곳이 나인 것은 그동안 내가 잘 살아온 덕분이구나. 긴 호흡으로 여기서도 따뜻함을 나누며 살 수 있구나.

작가의 이전글 출근한 지 네 시간 만에 퇴근하는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