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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잘할 수 있어서 좋다.

요리내공!

아마 유치원 때쯤일 것이다. 학교를 가지 않았던 때이니까. 그때부터 음식에 대한 기억은 굉장히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담겨 있다. 그렇다고 먹는 것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만드는 것이다. 특히 명절음식에 대한 기억은 강렬하다. 색색으로 빚어진 갖가지의 음식은 나에게 무척 긍정적인 시각적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의 어린 아이에게는 음식을 만드는 엄마 옆에서 앉아 있다가 귀여운 막내아들이 본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엄마가 맛있게 한 입 넣어주면 그것으로 행복한 나이인데 난 그렇지 않았다. 촉각놀이라고 하던가? 아이들의 소근육이나 인지능력을 향상하기 위하여 음식재료를 가지고 교육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난 놀이 따위가 아니라 당당한 일손으로 참여했다. 만두 빚기, 전 부치기, 심지어 가래떡 썰기까지(과일 껍질도 아주 얇게 잘 깎았다.ㅋㅋ)




김장철이 되면 우리 집 거실의 한쪽 벽면에 신문지를 깔고 배추를 쌓아올렸다. 어릴 때의 기억이라 어느 정도 왜곡됐을 거라는 것을 고려하고라도 정말 산더미 같았다. 다듬고, 자르고, 씻고, 소금물에 절이고, 또 씻고, 물 빼고, 소 넣고, 항아리에 차곡차곡 고 이 모든 일을 엄마와 나이차이 많이 나는 누나와 함께 했다.

이 모든 과정 중의 백미는 소 만들기였다. 채 썬 무와 당근, 파 등등의 갖가지 재료와 약간의 젓갈을 쏟아붓고(어린 내가 보기엔 정말 쏟아붓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엄마는 날 불렀다. 그러면 나는 커다란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빨간 고춧가루를 그릇에 담아 엄마가 멈추라는 신호를 줄 때까지 쏟아부었다. 하얗고 파랗고 주황빛 도는 재료들은 내가 투하한 고춧가루 폭탄을 맞고 점차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만족의 고갯짓을 몇 번 끄덕인 엄마 마법사는 이윽고 마법의 빨간 고무장갑을 두 손에 끼고 쓱쓱 재료들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그 옆에 대기하고 있던 나는 마법사의 요청에 따라 모기 눈알, 청개구리의 심장, 방울뱀의 어금니 등을 조금씩 추가했다. 나이차이 많이 나는 누나도 이 과정에는 섣불리 참여하지 못했다. 드디어 소 버무리기를 끝낸 마법사는 잘 절여진 배춧잎을 한 장 뜯어 잘 버무려진 소와 함께 돌돌 말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와... 아까 저 재료들이 이렇게 환상적인 맛으로 변했구나! 윽... 맵다.  

                                                                                                                                                                                                                                            

"엄마, 근데 좀 짠 것 같아."

"원래 좀 짜야 돼."


그런데 이 과정 중에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따뜻한 방 안에서 신문을 보는 아버지와 내가 하얀 그릇에 담긴 생굴과 양념장을 아버지에게 갖다드리는 것이다.(분명 아버지도 배추를 날랐는데.)




이렇게 잠재된 요리의 내공이 빛을 발할 때가 드디어 찾아왔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직할 회사들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원서를 내고 있을 때, 교회를 다녀오던 엄마가 눈길에 넘어져서 발목에 금이 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무릎 위까지 깁스를 두른 엄마는 목발을 짚은 상태로 민첩하게 집안을 오가기는 불가능했다. 엄마가 하던 모든 집안일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넘어왔다. 청소나 빨래는 늘상 하던 거라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까지 엄마가 해오던 요리는 사실 좀 막막했다.(참, 나이차이 많이 나는 누나는 그때는 이미 결혼해서 어린아이가 둘이나 딸린 상태였다.)  

상황을 지켜본 엄마는 수렴청정의 모드로 변환했다.

오늘의 메뉴가 선택이 되면 나는 재래시장의 어느 위치에 가면 어떤 재료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의 양을 사 오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그대로 수행하고 엄마의 지시에 따라 재료를 손질하고 재료에 따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썰기를 끝내고 갖가지 양념을 추가해 음식을 만들어내는 세자수업을 했다. 이후 엄마의 레시피 대로 만들면서 내 음식도 흉내 낸 것에 비하면 꽤 괜찮은 맛을 냈다.

내가 음식에 대해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엄마는 그때부터 수렴청정을 끝내고 별당으로 물러앉아 엄마가 모시는 주님과 깊은 대화를 하기도 하고 그가 내는 숙제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뭘 만들어 먹어야 하나."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인터넷에 떠도는 레시피라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작해야 여성잡지를 사면 부록으로 주는 요리책에 있는 메뉴가 전부였다. 거기에서 알려주는 재료들은 듣도보도 못한 것들이 많아서 내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포기해 버리고(사실 그런 재료는 없어도 그만인 것들인데 그때야 몰랐지 뭐)늘 먹던 국이나 몇 가지 볶음 요리와 무침 정도로 버틴 것 같다.


집안일에 치어 살던 그때 어렵게 틈을 내어 유럽여행 중에 만났던 나이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 누나와 만나 사는 얘기를 하는 중에 미역국 끓이는 법을 얘기하고 있었다.


" 미역국 그렇게 끓이는 거 아니야. 먼저 잘 불린 미역이랑 잘게 썬 쇠고기를 참기름을 넣어 함께 달달 볶아야 맛있는 미역국이 되는 거야."


뭐야? 우리 엄마는 그거 한꺼 번에 넣고 끓이는데. 근데 맛있는데...


약 두 달 동안의 엄마 역할을 대신하면서 느꼈던 건 주부들이 입에 달고 사는 "오늘은 뭘 해 먹지?" 하는 걱정이 뭔지 알았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매 끼니마다 어떤 음식을 해야 건강하게 맛있게 우리 가족들이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게 드러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때는 허무하기도 한 그것. 난 완전 공감한다.(어린 캐네디언 하고 일을 같이 한 적이 있는데 깔끔하게 도시락을 싸오는 걸 보고  엄마가 매일 도시락을 싸주니 좋겠다 했더니 "우리 엄마는 음식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헐... 그럼 항상 사왔던 거구나...)




캐나다로 와서 음식을 하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아이들의 도시락부터(캐나다는 학교급식이 거의 없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알러지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그 때문에 한국 엄마들이 때 아닌 도시락 싸기로 아침이 무척 분주하다.) 저녁메뉴까지 다 만들어낸다. 좀 더 맛있게 만들고 싶은데 재료의 한계로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채소들이 한국과 종류는 같지만 맛이나 향이 많이 떨어져 기대하는 맛을 못 낸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서 유명하다는 한식집을 가도 한국의 분식집에서 간이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경우가 많다.(한국마트에 원하는 것들이 분명 있지만 주로 미국에서 재배해 오는 것들이라 만들어 놓고 나면 맛이 영 아니다.) 그렇다고 여기 서양 음식을 먹기에는 너무 거나 달고 또 기름지고 동양 음식을 먹자니 너무 현지화가 되어 있어 도통 국적불명의 음식이 되어 있다.(요리에 취미가 없는 한국분들은 진작에 여기 음식을 받아들이고 산다.) 그래서 어떻게든 집에서 만든다. 배추김치부터 현미 막걸리까지 실제로 지금까지 여러 음식을 만들어 보았다. 뭐 그런대로 먹을만하고 평도 나쁘지 않고 ㅋㅋ

먹성 좋은 나와 우리 아이들의 건강을 위하여 오늘도 나는 뭘 해 먹을까 상상을 해본다.



이미지 : https://pixabay.com/photos/alum-dining-food-korean-749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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