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인들에게 몇 번 들려줘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글쓰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게 뭘 대단한 자랑거리냐는 듯 무심한 대꾸로 끝나버려 빨갛게 상기되도록 열심히 떠든 내가 괜히 무색해질 뿐이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께서는 그냥 그저 동업자 의식?으로 들어주시길 바란다. 다행히 얼마 안 되니까 맥주 한 잔 하시면서 심심풀이로 봐주시길...
결혼식 전날에도 글을 썼다!
첫 번째 에피소드.
결혼을 앞둔 약 한 달 전쯤, 모임에서 만나 친해진 후배가 연락이 왔다. 그가 몸담고 있던 다른 모임에서 정기 간행물을 만들고 있는데 이번 주제에 내가 딱 들어맞는 글을 써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어떤 형식이든 믿고 맡긴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전 화에도 밝혔듯 원고부탁은 사양하지 않았다. 거기다 '내가 딱','믿고 맡긴다' 하... 요 지점에서 난 거부할 수 없었다. 학교 내 '왕따' 문제에 관한 주제였다. 기한은 한 달. 뭐 충분하네.
결혼이라는 건 만만치 않은 절차였다. 6개월 전부터 진행된 절차는 마지막 한 달을 앞두고 정말 몰아치듯 진행되었다. 보내고, 받고, 결정하고, 연락하고, 찾아가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갖가지 상념... 결혼식과 장례식은 정신없이 지나가야 마칠 수 있다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었다.
그 가운데 잊지는 않고 있었다. 부탁받은 원고를 써야 하는데... 가끔씩 물어오는 후배의 전화에는 걱정말라고 내가 누구냐고 큰소리는 쳤지만 아직 한 글자도 못 썼는데...(솔직히 말하자면 쓸 시간이 없었겠는가. 미루고 미루는 습관 때문이었지.) 시간은 정말로 비웃 듯 빠르게 지나가서 드디어 결혼식 전날 밤 10시. 결국 난 흰 종이와 펜을 들고 방바닥에 엎드렸다.(컴퓨터도 있었는데 그 당시엔 글은 꼭 종이에 손으로 썼다.) 아직도 기억난다. 비무장한 약자를 짓밟는 포악한 권력집단에 대해 방관하고 동조하는 대다수의 비겁함을 왕따현상과 연관지은 내용이었다. 몇 시간 후면 결혼식인데 새벽 두 시에 완성했다. 내가 쓴 원고를 다음 날 입을 예복 주머니에 고이 모셔두고 드디어 잠을 청했다.
다음 날 결혼식에 참석한 그 후배를 보자마자 아주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원고를 꺼내서 그 후배에게 쥐어주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결혼식에 참석한 우리 모임의 다른 분은 오늘 원고는 못 받을 거다. 결혼하는 신랑이 무슨 정신으로 글을 써오겠냐. 후배는 아니다 분명 가지고 올거다. 두 사람과 상관없이 나는 매우 뿌듯했다.
결혼식 전날인데도 글을 썼다!
이젠 내 글이 법원에도 진출?!
두 번째 에피소드.
살면서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셨던 보험에 대해서 보험회사와의 보험금 청구소송이었다. 승소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나로서는 신빙성 있는 증거도 있었고 해서 후회하지 말자 생각하고 변호사를 수소문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몇 차례의 상담 후에 준비서면이라는 걸 보내줬는데 재판 전에 판사에게 보내야 할 서류로 나의 주장을 적어야 한다고 했다. 열개 정도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이었는데 이것을 토대로 변호사가 다시 수정해서 법정에 보내겠다고 했다. 준비서면 양식을 받아보니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었다.(민사소송이라 그런가? 형사소송은 좀 다를라나?) 논설문 쓰듯이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육하원칙에 따라 설명과 주장을 했고 증거사진도 첨부해 가면서 변호사가 이해하고 편집하기 최대한 쉽게 작성해서 보내줬다.(그래도 양은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후 준비서면 잘 받았고 내용도 좋으니 거의 그대로 보내겠다는 내용의 답 메일을 받았다. 첨부된 것을 보니 뭐 허무할 정도로 똑같았다. 오! 이 정도라고? 내가 처음 써보는 법정다툼용 글쓰기였는데도 고칠 게 없다고? 와우... 약간의 희망이 피어올랐으나 1심은 결국 패소했다. 판사는 우리 측에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확실한 증거? 그게 단데? 확실한 증거가 더 있다면 재판을 왜 했겠니? 깨끗이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에게 한 가지 스멀스멀 차오르는 게 있었다.
이젠 내 글이 법원에도 진출?!
글솜씨만이 아니라 경험도 중요한 요소
세 번째 에피소드.
결혼하고 얼마 후 다니고 있는 직장이 많이 따분했다. 대단한 회사도 아니었고 나도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이대로라면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까 뭐 그런 종류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특이한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공보비서관 모집'. 공보라면 정당 같은 데서 기자회견이나 성명을 낼 때 그 내용을 작성하거나 회견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 정도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오!!! 그래 이거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 잘할 자신 있는 일.
구인광고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서류전형은 이력서, 자기소개서와 함께 '열린 음악회' 한 회분을 시청하고 비평문을 작성해서 보내는 거였다. 그 착하디 착한 열린 음악회가 비평할 게 뭐가 있다고... 멀쩡한 피디, 진행자, 가수들을 무릎 꿇려 족쳐서 없는 흠집을 만들어 보냈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면접전형 통보가 왔다. 면접장은 사무실이 아니라 웬 대형 호텔의 한 방이었다. 면접 진행요원이 알려주길 이전 정부에서 부총리를 하셨던 분(나도 잘 아는 내가 전공한 과목의 유명한 교수님이었다.)이 개인 연구소를 차리는데 그곳에서 필요한 연설문 작성 비서관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을 쓱 둘러봤는데 나이대는 완전 천차만별 내가 제일 어린 것 같아 보였다. 우연하게도 진행요원이 내 옆에서 일을 하는 바람에 슬쩍 참석자 명단을 보게 되었는데 학교, 경력 등이 장난 아님.(왜 명단에 그런 것까지 쓰여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에 기가 죽을 내가 아니지. 면접을 시작하기 전 글쓰기를 한 차례 더 시켰다. 이번엔 '발바닥'이라는 주제로 수필을 쓰라고 했다. 제길... 쓰라고 하면 자동으로 막 나오냐?? 술술 자동으로 나왔다.
바로 진행된 면접. 교수님은 TV에서 봤던 것보다 인상이 더 부드러웠다. 본인이 몸담고 있었던 정부의 어떤 정책에 대해서 물어봤었는데 별로 막힘없이 내 의견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저분하고 같이 일하면 좋겠다...
얼마 후에 연락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떨어졌다고. 목소리가 그때 그 진행요원이었다. 낙방한 사람들한테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마지막에 툭 걸리는 게 있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문제였다고 했다. 공보비서관이라는 일이 글솜씨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경험도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라 그것 때문에 많이 망설였다고 했다. 모를 일이지만 그의 말을 정말로 믿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갖가지 실패와 낙방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때처럼 아쉽고 안타까웠던 적이 없었다.
사는 게 재미없을 때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그때부터 연설문 작성 일을 했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야기를 풀어놓고 보니 어째 좀 부끄럽기도 하고 괜히 했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 글쓰기라는 게나 자신 우쭐하기도 하지만 한없이 겸손해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자랑하고 싶은 글뽕의 순간만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또다시 아쉬움의 순간도 걸려 올라왔다. 뭐 어떡하겠나. 이만큼 썼는데 지울 수도 없고. 솔직히 저런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계기가 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맞다, 그렇다. 이 마약과도 같은 죽일 놈의 글쓰기의 마력... 독자님들도 모두 공감하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