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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어중추는 언제 할아버지가 됐냐?

꾸준한 연습과 반복만이 답이라네요.(에라이!)


내 차례가 되었다.

선생인지 직원인지의 안내를 따라서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아담한 방에 책상과 의자가 있었는데 일반적인 성인 백인의 얼굴모습과 달리 한국사람 저리 가라 하게 얼굴이 무척 큰 남자가 앉아 있었다. 리스닝, 스피킹 테스트를 한다고 했으니 선생님이겠지.

직전에 치른 만만치 않았던 리딩, 라이팅 시험의 여파로 여전히 긴장된 상태인데 그 남자가 무언가를 물어봤다. 어? 분명히 별거 아닌 질문인 것 같은데 못 알아듣겠다. 중요한 단어 하나만이라도 들리면 대답을 하겠는데 처음 듣는 단어들인 것 같았다. 그가 다시 조금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대충 감을 잡고 대답을 했다. 그가 종이 위에 뭔가를 체크했는데 내 대답이 맞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번엔 다른 종류의 질문을 했다. 역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결코 막 빠르게 하는 말이 아닌데 살짝 돌려 말한 듯했다. 그가 다시 조금 천천히 내가 알아들을 만한 단어로 물었다. 그제야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한 오 분 정도 했나?가방을 들고 나오는 나의 기분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캐나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요구하는 영어점수가 IELTS 5.5 이상이에요. 영어 좀 하시는데 점수가 없는 분들은 두세 달 바짝 해서 점수 만들어서 들어가세요. 선생님도 그렇게 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해볼까 해서 좀 봤는데 영국식 영어발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더라구요. 거기다 리스닝이 아프리카 영어, 인도 영어, 중국 영어가 섞여서 나오던데,  와... 미국식 영어도 모르겠는데 영국식을?못하겠어요."

"그럼 일 년 정도 어학원 다니셔야 돼요." 


물론 IELTS 말고도 토익, 토플 같은 것도 인정해 주던데 점수가 만만치 않았다. 내가 무슨 캐나다에 유학 가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무난하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이 거기 대학을 나오는 거라니 할 수 없이 하는데 얼마나 오를지 모를 영어성적을 붙잡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학원 과정을 들어가기로 했고 첫날 레벨 테스트에서 저 모양이 된 것이다. 결과는 예상보다 한 단계 아랫반으로 배치되었다. 역시 그놈의 리스닝, 스피킹 때문이겠지.  


반마다 가득 있는 학생들의 반은 중국인 그다음이 한국인, 인도인 나머지가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 몇몇이었다. 이들과 함께 아침에 3시간, 점심 먹고 2시간 30분을 영어 수업을 들었다. 일주일 내내 같이 지내다 보니 형님아우 언니누나 다 생기고, 말로만 들었던 인종적, 국가적 편견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고(어쩌면 그리도 전형적인지. 문화차이인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 그랬다.




이렇게 열심히 어학원을 다녀도 그리 신통치 않은 것 같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서 하는 영어 클래스도 다녔다. 은퇴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뉴커머들과 함께 일대일로 회화를 하는 그런 방식이었는데 꽤 유익한 시간이었다.(어느 누가 너 내가 붙잡고 앉아서 일대일로 회화공부 시켜줄게 하겠나.)

한 번은 나를 담당하던 할아버지에게 한국의 전세제도에 대해서 한참을 설명해 준 일이 있었다. 처음엔 전세라는 개념을 도통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단지 전세 보증금을 주인한테 맡기니까 임대료는 내지 않는다는 것에는 무척 흥미로워했다.


"그런데 만약 그 큰돈을 계약 종료 후에 돌려받지 못하면 어떡해? 주인이 전세보증금으로 주식 같은 데 투자했다가 망해버릴 수도 있잖아."

"그래서 세입자를 위한 여러가지 보호법률이 있어서(확정일자, 전세권 설정 등)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제없이 계약이 잘 지켜져요."


다 아는 성경말씀 공부하는 것보다 아주 재미있었다.(상대방이 우호적으로 들어준다면 나도 웬만큼 얘기할 수 있다!ㅋㅋ)


"거기다 주인은 받은 전세보증금을 가지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거나, 투자를 해서 이익금을 얻을 수 있어서 아주 좋아요."

"거 봐, 그러다 전세 보증금 날리면 돌려받지 못할 거잖아."

"아니죠, 다음에 들어오는 새로운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받아서 돌려주면 되죠."

"와우~~~!! 언빌리버블!!"


이렇게 그 교회에서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 중에 한국인 가정이 있었다. 의사인 아빠와 아내 아들 둘.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빵 터지는 농담도 할 정도로 영어를 잘했는데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겸해서 수업에 참여하는 듯했다.

서로 몇 차례 안면을 튼 후에 내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름 좀 해보려고 수업도 열심히 다니고 공부도 하고 그러는데 영어가 도통 안 느는 것 같아요."

"그 나이에는 당연한 거예요."

"아닌데. 그래도 다른 공부는 이십 대 때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는데요."

"듣기 하고 말하기요. 뇌의 언어중추가 우리 나이 대는 노화되는 중이라 실제로 잘 안 들리고 말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모국어도 마찬가지구요. 외국어는 더 하죠."


그래서 그런가 사람 이름이 잘 안 떠오르기도 하고 특정 단어가 생각이 안 나기도 하는데...


"근데 선생님은 잘하시잖아요."

"방법이 있어요. 꾸준한 반복과 연습! 그럼 가능해요. 제가 좀 하는 건 우리 병원에 외국인 환자가 많았거든요."


오~~! 노오력!이것도 역시 노력만이 답인가? 몇 년 좀 있다가 보면 꼬마들 말 느는 것처럼 어떻게 안 되는 것인가?나이가 들어 노화되는 무릎관절 대신 다리근육을 강화시켜 관절과 인대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 노화되고 있는 언어중추만 괴롭히지 말고 꾸준히 반복하고 연습해서 잘할 생각을 해라... 에라이! 이젠 뇌까지 나를 괴롭히네. 언제 나의 언어중추는 나에게 말도 없이 할아버지가 됐냐. 그만 재고 좀 더 일찍 올걸. 그래야 애들도 좀 편했을 텐데...




한 육 개월가량 그 교회 영어수업을 다녔. 대학에 들어가는 바람에 시간이 맞지 않아서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별선물로 담당 할아버지께 수저세트를 드렸다. 한국에서는 어른들에게 수저세트 선물을 많이 한다고. 많이 드시고 오래 사시라고.(맞나 모르겠다. 어디서 얼핏 들은 것 같아서)


나의 영어이름과 같았던 크리스 할아버지.

몸 건강히 잘 지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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