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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키나 pickina May 12. 2023

백수가 느끼는 불안감의 정도에 대한 고찰

고연차 vs 저연차


모든 백수는 불안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백수는 불안할까?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통장에 따박따박 찍히는 월급이 없어서이든, 나의 능력에 대한 부정인 것 같아서이든, 부모님의 눈치 때문이든, 다시는 취업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자신감 하락 때문이든.. 대부분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이번에 그만둔 직장 전후로 백수인 기간이 있는데, 이전에 느꼈던 불안감과 지금 그 정도가 매우 달라서 그 이유에 대한 고찰을 해보려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경력이 길어질수록 백수기간, 혹은 잠시 쉬어가는 기간에 대한 불안감이 낮아지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사람과 케이스에 따라 공감이 되는 부분도, 아닌 부분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참고 부탁드린다.

이직이 아닌 퇴사에 대한 이야기인 점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연차가 쌓였다.


연차가 쌓이면서 세상과 직장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신입사원이자 저연차인 경우 직장과 연봉이 내 삶의 전부이고, 내가 여태껏 노력한 것들을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스타트업에 겨우 취업해서 2천만 원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데 나와 같은 대학을 나온 친구는 대기업에 한방에 취업해서 두 배 이상의 초봉을 받는다면, 나와 그 친구의 능력치가 그만큼 차이 난다는 느낌을 받으며 조급함이 들고, 자존감이 낮아질 것이다. 하지만 2017년 첫 취업 후 어느덧 6년 차 직장인이 된 지금, 나는 회사가 전부가 아님을 안다. 돈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고, 회사에서 인정받으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동기부여가 뽝 되지도 않는다. 정말 특별히 덕업일치가 된 케이스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고연차 직장인은 회사와 돈과 노동력을 등가교환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워라밸이라는 말이 그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워크와 라이프를 별도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그것의 균형을 지킨다는 말이니 일은 곧 나의 삶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 회사를 쉬더라도 예전처럼 나의 경력이 다 의미 없는 물경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중고 신입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 등 조급함이 조금 사라지고 삶에 대해서 좀 더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연차가 쌓였기 때문에 나를 좋게 봐주는 인맥도 쌓였고, 내가 회사에서 해왔던 일들은 어디 가지 않는다. 이를 토대로 경력직 채용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저연차 때보다는 불안감을 덜 느끼고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해 볼 수 있다.


돈을 모아 두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다.


회사를 그만둔 후 초조해지는 이유가 커리어 외에 "돈"이 가장 클 것이다. 따박따박 월급날이면 꽂히던 몇백만 원의 돈이 이제는 없다.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은 있고, 그동안의 소비습관도 있어서 사고 싶은 것들도 있을 텐데 이런 고정 수입이 없어진다는 것은 타격이 크다. 특별한 이유 없이 회사가 싫어서 그만둔 저연차 직장인들이, 퇴사 기념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에 다급하게 이것저것 재지도 않고 이력서를 내고 다니는 것도 돈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고연차 직장인들은 이미 충분히 모아둔 자금이 있다. 우리는 으른이니까!


고연차는 나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소속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불안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 나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나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다. 내가 사회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 단순히 회사가 싫어서 그만둔다면, 나의 자존감도 바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잠이나 자자."라며 방콕 백수 생활을 보내다 보면 우울감에 빠지고, 나의 능력치는 더더욱 바닥을 찍게 될 것이다. 고연차는 많은 것을 겪어보고, 조직에 대해 불만도 품어보고,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가져보고, 칭찬도 들어보고 갈등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퇴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재취업도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하면 될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게 된다. 


연차가 높아질수록 포기하는 것들, 즉 기회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에 무작정 때려치우지 않는다.


고연차가 이직이 아닌 퇴사를 선택하는 이유가 "회사가 싫어서" 혹은 "힘들어서"인 경우는 거의 없다. 고연차일수록 기회비용이 높아진다. 회사를 그만뒀을 때 내가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자꾸 나를 잡아당긴다. 예를 들면 높은 연봉, 괜찮은 회사의 네임밸류, 회사에서 인정받고 자리 잡는 데 걸린 시간, 좋은 동료들 등등. 그렇기 때문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 기회비용을 포기해도 괜찮을 정도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을 때, 혹은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때에 퇴사를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감의 정도는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다.




2018년 11월에 메이크어스 딩고를 퇴사하였을 때, 나는 방에서만 누워 지냈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행복하지도 않았다. 바이오리듬은 무너졌고, 밤늦게 잠들고 낮에야 일어나기 일쑤였다. 메이크어스를 퇴사한 이유는 비상식적인 상사와 그 상사를 무지성으로 예뻐하는 상무 때문이었다. 3개월 수습을 마치고 그냥 아니다 생각이 들어서 퇴사해 버렸고 딱히 이직처를 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위워크에 면접을 보게 되었고 최종까지 합격 후 오퍼레터를 받기 전에 2019년 1월 한 달 살기를 하기 위해 바르셀로나행 티켓을 예매했다.


2023년 4월 5일 위워크에서의 마지막 근무날, 나는 똑같이 이직처를 정해두지 않고 나왔지만 지금 아쉬운 마음은 없다. 이미 모든 것을 다 겪고 볼장 다 보고 나왔고, 그렇다고 안 좋은 기억이 많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은 동료들과 좋은 기억 밖에 없고, 팀장님께서도 나를 정말 많이 예뻐해 주셨다. 예전과 달리 아쉬운 것들이 정말 많았지만 오히려 불안감은 없고 너무나 상쾌하다. 그 이유는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1년간의 오랜 고민 끝에 나왔고, 그것을 회사에서도 응원해 줬기 때문이다. 도피가 아니라 도약을 위해 퇴사를 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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