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choring Effect를 조심하라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시절, 트럼프는 한국 정부에게 방위비 분담금을 '5배 인상하라'는 요구를 먼저 던졌다.
이후에 이런저런 증액안이 등장했다. 쉽게 보면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
트럼프: 5배 인상해라
한국 & 미국 실무단: 음.. 13.9% 인상하는 걸로 합의하자
트럼프: 무슨 소리! 50%는 인상해야지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트럼프는 물러났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후, 1년간 교착상태에 있던 협상이 46일 만에 타결됐다. 우리로서는 트럼프가 물러날 때까지 협상이 미뤄진 것은 아주 다행이었다.
트럼프는 진심으로 5배 인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실현 가능성을 따져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노렸던 효과는 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가격이라도 먼저 제시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효과를 전문 용어로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한다. 배의 닻을 내리는 효과, 즉 상대방의 생각에 "이 정도는 내야지. 이게 기준이야."라는 닻을 먼저 내려버리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가격을 제시된 가격이 先기준이 되어버려 협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먼저 가격을 제시한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위의 경우 트럼프가 5배 인상하라는 요구가 닻이 되어버렸다.
나는 가격 A를 제시하고 상대방은 가격 B 제시했다. 여기서 내가 상대방보다 먼저 A를 입 밖에 꺼낸다면? 내가 원하는 가격, 즉 내 패를 보여줬으니 손해일까?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A 쪽에 유리한 협상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한다. <당신은 협상을 아는가>라는 책에 따르면, 부동산 중개업자 vs. 부동산 문외한인 매도인의 거래에서도, 먼저 가격을 제시한 매도인의 가격에 베테랑 중개업자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p.255)
실제로 필자가 실습해본 가상의 부동산 거래에서도 동일한 효과를 경험했다. 내가 먼저 가격을 제시했는데 (착한) 상대방 친구가 내가 제시한 가격에 가깝게 자신의 가격을 맞춰주었다. 덕분에 나에게 아주 유리한 협상이 되어버렸다.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도 비슷하게 협상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방위비 분담금 협상으로 돌아가 보자.
13.9%도 우리 측에겐 전례 없는 증액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처음 제시한 5배(=500%)와 비교하면 아주 많이 줄인 것 같아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상대방은 원래 500%를 요구했는데 우리가 협상해서 13.9% 까지나 줄였어."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만약 트럼프의 5배 인상안 없이 곧바로 13.9% 인상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면 상대적으로 13.9%는 아주 높은 수준의 인상안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증액안'이라는 단어 자체에도 앵커링 효과가 숨어있다. 증액은 미국 측의 제안이지 우리까지 증액을 무조건 해야 한다는 단어를 굳이 만들어 쓸 필요는 없었다. 기자들은 이 단어를 편의상 사용했겠지만 말이다. '미국 측 요구', '미국 측 제안' 정도로 쓰는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훨씬 객관적이고 협상에 도움이 되는 단어다.
협상 전부터 이미 상대방은 "나는 이 정도 가격을 요구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을지도 모른다. 트럼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앵커링 효과를 피하려면 그 소식을 듣기 전에 내 마음속의 기준을 먼저 세팅해두어야 한다. 행여나 상대방의 제안이 내 마음속 기준과 아주 거리가 멀더라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제안이 정말 타당한 것인지, 제대로 정보를 알고 하는 말인지 다시 검토해보아야 한다. 협상장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가격을 제시하더라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도록, 거기서부터 협상이 시작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역으로 우리도 이 효과를 사용할 수 있다. 가능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조직의 공식적인 견해로서 가격을 제시하기보다는, "듣자 하니 이 정도 가격을 원한다더라"는 소문 정도로 상대방에게 우리의 닻을 전해 줄 수 있다. 협상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부터 말이다. 협상이 임박해졌을 때, 우리가 먼저 제시한 가격이 불리하다고 판정된다면, "그냥 들리는 소문"이라고 일축할 수 있고, 유리하다면 "맞아, 그 소문 사실이야"라고 밀어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