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케인 Susan Cain을 기억하는가?
내가 표현할 수 없었고 내가 증명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의 내향성을 인정하게 만들어준 [콰이어트 Quiet]의 작가이자 내향성이 얼마나 위대한 기질인가를 깨닫게 해 준 사람이다. 이번엔 ‘bitter-sweet’이란 단어를 가지고 찾아왔다. 작가의 명성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나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단어였으나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선 ‘내 삶에서 이 책을 통해 또 무엇 하나를 얻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달콤씁쓸함’이란 하나의 감정은 아니다.
대략의 느낌은 오지만 곱씹어 읽어봐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형용사다.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단어가 합쳐졌는데 의미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흰색과 검은색이 합쳐져 합당한 회색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무채색에 머물러 있지도 않는 또 다른 색상을 가진 단어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를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의미를 파헤치는 과정 중 자주 보이는 단어들을 열거해 보자면 슬픔, 연민, 고통 그리고 갈망과 같은 단어들이다.
생각해 보면 ‘달콤씁쓸한 감정’이란 신나는 단어는 아니다.
사실 우리는 웃고 즐기고 행복할 때보단 슬플 때가 훨씬 많다. 마냥 신나고 행복하지도(plus 100%) 않지만 너무나 깊게 슬프기 만한 것도(minus 100%) 아닌 두 가지의 감정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상태가 삶의 대부분이다. ±100%의 범위 내에서 어떤 특정영역이 bitter-sweet이라고 이해했는데 아마도 슬픔이 조금 더 많이 섞여 있는 듯하다.
내향성을 위대한 기질로 인정하게 만들었던 수전 케인은 자신의 내공을 [비터스위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우리 사회는 이런 감정을 왜 두려워하는가? 슬픔과 갈망을 부정하는 ‘긍정의 횡포’ 속에서 진정성 있는 삶과 일을 어떻게 이어갈까? 모든 것이 아주 좋다고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슬픔과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 초월,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 개념이다. 슬픔을 좀 더 높이 대우해 줄 수 있다면, 억지 미소와 정당한 분노보다는 슬픔을 서로의 결속을 위해 필요한 연결다리로 주목해 보자는 것이다. 비극 그 자체를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슬프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것, 즉 씁쓸함과 달콤함이 어우러진 bitter-sweet이기 때문이다.
달콤씁쓸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스스로에게 슬픔과 갈망 같은 힘든 감정을 허용해주지 않으면 이런 감정들이 결국에는 번번이 우리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살면서 문득문득 멜랑콜리해지고 사무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 머릿속이나 마음속에서 불현듯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콤씁쓸한 본성과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간조건은 떼어낼 수 없다. 주변 사람이나 가족과 사별의 슬픔과 자신의 비영속성이 상기되는 순간 달콤씁쓸해진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우리의 인생이 늘 달콤하고 씁쓸하다는 이중성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덜 불안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다. 어려웠다.
‘비터스위트’란 단어만큼 독후감 쓰기가 쉽질 않았다. 하지만 ‘갈망과 슬픔이 필요하다.’라는 (사회에 반反하는) 메시지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감내할 만했다. 그리고 기존에 읽었던 [콰이어트 Quiet] 보다 작가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혹은 작가를 조금 더 알 수 있었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