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라이 Mar 30. 2020

조는 로리를 사랑했을까? 그들이 결혼했다면 행복했을까?

영화 '작은 아씨들'이 던진 몇 가지 질문

 어쩌면 선택 그 자체는 절반 정도의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을 얻으려는 의지,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마음과 태도가 그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든다.

지난주 일요일 저녁에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Little Women)'을 보았다. 우리 가족은 주말에 식사를 하면서 영화나 드라마, 또는 예능 프로그램을 같이 본다. 보통 1시간 정도의 영상을 선택하는데 오늘은 왠지 '작은 아씨들'이 보고 싶었다.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은 아씨들'은 '빨강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와 더불어 여자들의 3대 애장서가 아닌가?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이미 몇번 보았는데도 그레타 거윅 감독은 어떤 시선으로 네 자매의 삶을 비출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가 길었다. 러닝타임 135분. 그날 저녁에는 마음 먹고 글을 쓸 생각이었기 때문에 망설였다. 이럴 때 나는 주로 다리를 한쪽에 살짝 걸치는 선택을 한다. '1시간만 보지 뭐'. 보았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으면 나중에 보거나 안 보면 된다. 재미가 있으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본다.


그렇게 선택을 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우리 모두가 평생에 걸쳐 그리워하는 찬란한 유년기에 대한 헌사이자 인생을 결정하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였다. 


둘째 조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작은 아씨들' 을 TV 만화영화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몸이 약하고 마음이 착한 셋째 '베스'가 좋았다. 조금 더 커서 소설을 읽었을 때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독립적인 '조'에게 끌렸다. '위노나 라이더'가 나오는 동명의 영화를 보았을 때도 여전히 내 시선은 조에게 집중돼 있었다. 감독의 시선도 그렇고.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을 보면서, 이번에는 네 자매에게 시선이 골고루 분산됐다. 특히 메그와 조, 에이미. 이렇게 세 자매에게. 상황 속에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베스와는 달리, 세 자매는 모두 자신들의 인생을 걸고 중요한 선택을 했다.

 

영화 <작은 아씨들>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조는 로리를 사랑했을까? 그를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까? 


출판사 사장은 조에게 '왜 여주인공이 옆집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결혼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조는 로리를 사랑했다고.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과 둘 사이에 쌓여진 스토리는 흔히 말하는 '사랑의 전제'였다. 로리는 조를 사랑했고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조는 로리를 사랑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녀의 마음에는 '이성과의 사랑'에 대한 공간이 없었다. '작가로서의 성공'과 '독립적인 삶'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기에.


로리를 사랑했음을, 적어도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 두 가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동생 '베스'의 죽음으로 마음이 공허해졌을 때였다. 사랑은 필요다. 아무리 충분히 멋진 이성이 옆에 있어도, 내 속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는 로리에게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이번에는 '예'라고 말하겠다고 편지를 쓰지만, 로리는 조에게 거절 당한 그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로리를 마음 속으로 좋아하면서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가고 있었던 넷째 에이미가 그의 마음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조는 로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어릴 때부터 알았던 철부지 소년'으로 취급했다. 로리 안에도 분명히 그 이상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미는 로리를 다르게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 로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에는 그만의 보석이 있으며 설사 그 보석을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원석이었던 것이다. 에이미로부터 전폭적인 사랑과 존중의 시선을 받은 로리는 변한다. 그녀의 사랑이 내면의 원석을 깨운 것이다.


조는 오만했다. 스스로 인생을 독립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로리를 제대로 보아주지 않았다.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를 어린 시절의 옆집 소년에서 한발자국도 못 벗어난 '고정된 존재'로 보았다. 그 대가는 로리를 잃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조가 로리와 결혼했으면 행복했을까?


이번에도 그 결과는 그녀의 선택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로리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고 그를 존중했다면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로리는 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숭배했으므로. 하지만 여전히 그를 철부지 어린아이로 취급했다면 로리는 크게 상처 받고 그들은 불행해졌을 지도 모른다.


조가 뉴욕에서 알게 된 대학교수 프리드리히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 잘 알지도 못했고 둘 사이에는 쌓인 시간과 추억도 별로 없는데.


나는 베스와 로리를 잃음으로써 드디어 조의 마음에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허감, 자아의 약해짐은 사랑의 강력한 촉진제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그 마음이 있어야 그 사람을 자신의 곁에 붙들어 놓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난다. 그것은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절실함에 가깝다.


결국, 조는 '그 때'를 만난 것이다. 사랑하는 베스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내심 믿었던 로리가 자신의 곁을 떠나자 조는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그녀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프리드리히를 붙잡게 만들었다.  조는 때가 되었고 눈 앞의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선택했고 그 선택을 사랑이라고 믿었으며 결국 자신의 선택을 운명으로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조는 철이 늦게 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독립'과 '작가로서의 성공'에만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과의 사랑'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른 것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세상을 키워나가는 동안 메그와 에이미는 마음 속에 '사랑'의 공간을 키워나갔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았다. 결국 시차는 있었지만 모두 선택을 했고 자신들이 할애한 시간과 애정에 걸맞는 것을 얻었다. 매우 공평하게.


영화 <작은 아씨들>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는 분명 4식구가 함께 있었는데, 재미가 없는지 남편과 아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놀랍게도 제일 먼저 사라지곤 하던 딸이 끝까지 옆에 남아서 영화를 보았다.


딸은 '역시 돈이 중요한 것 같아. 돈이 있다면 저런 고민 안해도 되는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다'라는 대사를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볼멘 목소리로 '왜 여자는 저런 말을 듣고 살아야 하는 걸까?'라고 푸념했다.


나는 '그런 말에 신경쓰지 마라. 이젠 그런 시대가 아니다. 너도 알지 않느냐'라고 대답했다. 딸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남자보다 낮은 대우를 받고 자라지도 않았고 부모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여성비하 발언'은 딸에게 작은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해줄까 살짝 고민하다 이렇게 말했다.


'남들이 하는 말은 신경쓰지 마라. 네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면 된다.' '그래도 엄마는 한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다 가질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딸은 이번에도 '그런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도 뭔가 아쉬웠다. 딸에게 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 아니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인생은 선택이다. 다 가질 수는 없다." 여기까지는 같다.


"하지만 하나를 놓쳐도 다음 기회가 온다. 실수는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고, 성숙해진 사람은 다음 번 기회를 꽉 잡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본인이 눈을 크게 뜨고 찾는다면 나눠서 가질 수 있다."


"인생의 보물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기다린다. 자신을 음미해줄 때를 기다리면서."


저녁 시간에 '작은 아씨들'을 보기로 한 내 선택은 어땠을까? 잠시 볼까 보지 말까를 고민하다가 조금만 보고 결정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어느새 빠져들어서 끝까지 보았다. 예정에 없던 135분이 사라졌다.


그럼 나는 이 작은 선택이 후회스러웠을까? 아니, 이 영화를 봄으로써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고 고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과 계획 없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건 내가 '좋은 쪽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좋은 선택으로 남은 것이다. 만약 내가 '에이, 시간만 낭비하고 괜히 봤어. 그냥 원래 계획대로 글쓰기를 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생각했다면 그 선택은 좋지 않은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선택 그 자체는 절반 정도의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을 얻으려는 의지,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마음과 태도가 그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든다.


그러고 보면 선택이란 상황, 다른 사람들, 나의 의지 간의 3자 케미스트리다. 우리 인생의 자잘하고 중대한 모든 선택이 그 방정식 속에서 최종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매거진의 이전글 초라하지만 소중한 청춘의 풍경, 「프란시스 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