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Jun 13. 2022

나의 해방일지 (인물)


간만에 전율이 오는 드라마를 만나서 리뷰를 남겨봅니다. 제 개인적인 관심사가 신앙과 인간인데, 그 코드로 딱딱 맞아떨어지길래 보는 내내 즐거웠네요. 신앙 얘기 나오니까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 가기 눌러주세요. ^^ 그리고 어디까지나 제 관점의 해석일 뿐임을 말씀드려요.


이 가족의 시작은 <염제호(천호진 분)>입니다. 그의 삶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것입니다.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아담이 타락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들었던 그 말씀이죠. 제호는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합니다만, 그의 삶은 온통 고된 노동과 책임으로만 채워져 있을 뿐 어떤 즐거움도 없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웃는 일 한 번 없이 사막 같은 얼굴로 묵묵히 일을 합니다.


그가 악인이라서 이런 형벌 같은 삶을 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선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서 빚보증을 설 정도로, 외지인에 알콜중독인 구 씨에게 일을 주고 그의 가치를 알아봐 줄 정도로 선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죠. (구 씨는 몰라도) 동생의 보증을 섰다가 거액의 채무를 지게 되면서 그의 척박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가 동생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고통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사람의 선함의 한계입니다. 선한 사람의 선한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우선 그가 (결혼 전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사랑했던 아내는 그보다 더한 노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공장일과 밭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멍하니 티비를 보면서 쉴 수 있는 제호와는 다르게 그녀는 하루 종일 공장과 밭, 집을 바삐 오가며 집안일까지 전부 해내야 합니다. 적어도 제호의 노동은 집에 오면 끝나지만, 그녀에게 집은 또 다른 일터에 불과합니다. 밥상 앞에 앉아 있다가도 제호의 "어이, 소쿠리!" 하는 소리에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야 하죠.


심지어 트럭에서 구른 날도 밥을 차려 바쳐야 하는 신세에 그녀는 한탄을 쏟아내다가 결국 과로사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것도 그 지긋지긋한 밥을 하다가요(저는 여기서 그녀가 '그래도 교회 다닐 땐 일요일엔 쉬었다'면서 다시 교회에 다니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마음에 들어왔어요.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제호와 아내가 노동에 시달리는 동안 자식들은 그 나이대에 꼭 필요한 부모의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저마다 결핍을 가진 채 성장하게 됩니다. 사람의 애착 유형을 크게 I'm ok, you're ok (자기긍정-타인긍정) / I'm ok, you're not ok (자기 긍정-타인 부정) / I'm not ok, you're ok (자기부정-타인긍정) / I'm not ok, you're not ok (자기부정-타인부정)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요. 첫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불안정애착에 해당합니다.


<기정(이엘 분)>은 두 번째 유형, I'm ok, you're not ok (자기긍정-타인부정)에 속합니다.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데 남들은 다 안 괜찮은 그녀는 아침에 눈 떠서부터 밤에 잘 때까지 시풀시풀거리며 남들을 욕합니다. 그녀에게 씹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요.


그런 그녀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도 잘 못하는 순한 양이 됩니다. 이걸 보고 어떤 분들은 '이중인격이다, 캐릭터 붕괴다'라고 표현하시던데, 이 유형에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자기긍정'이라고 하니 자존감이 높을 것 같지만 아니거든요. 이 유형이 '나를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이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타인도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만한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긍정-타인긍정의 첫 번째 유형이 되지요.


두 번째 유형이 자기를 긍정하는 이유는 자신이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벌이든, 돈이든, 능력이든 뭔가 스스로 세운 기준이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끊임없이 점수화합니다. 기정은 아마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스펙에 괜찮은 업무능력, 그리고 (그 더러운 성질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남자들에게 대시를 받을 만큼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본인 입으로도 자기가 회사 안에서 10위 안에는 든다고 말하죠.


그렇기 때문에 기정은 연애를 못해요. 창희 말을 빌면 자기보다 점수가 낮은 사람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총으로 쏴 죽여야 한다'라고 길길이 날뛸 만큼 모욕감을 느끼는데, 누군가 좋아지면 그 사람은 나보다 점수가 높아 보여요. 그래서 내가 남을 무시한 만큼 그가 나를 무시할까 봐 두렵습니다. 누군가 좋아지면 기쁘기보다는 괴롭죠(기정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들 앞에서 주눅 든 표정을 자주 보입니다). 기정은 창희의 말을 듣고 회개한 이후, 개무시당할까 봐 고민해가며 했던 고백에 정중하게 거절하는 태훈의 태도를 보고 '이 나이에도 성장하는구나' 싶을 만큼 성숙해진 다음 비로소 해방되고, 사랑을 하게 됩니다.


기정은 또한 자기 욕망에 충실합니다. 미정이 묵묵하게, 창희가 투덜거리며 돕는 밭일을 기정은 한 번도 하지 않습니다. 집안일도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닥 나서지 않았죠. 미정과 한 방에서 자면서도 기정은 침대에서, 미정은 바닥에서 자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극 중에는 안 나오지만 아마도 기정은 염 씨 집안의 그 한정된 자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거침이 없었을 거예요. 이것이 미정의 불행 중 하나입니다. 기정이 적당히 양보하고 배려하는 성격이었다면 자매는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되어 주는 관계를 맺었겠지만, 기정 때문에 미정은 자원은 빼앗기고, 궂은일은 도맡는 신세가 되었지요.


하지만 기정은 창희의 얄미운 직장동료 정대리나 미정 회사의 파마머리처럼 남 뒤통수 치는 사람과는 결이 다릅니다. 자신의 표현대로 '진돗개 같은 여자'지요.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주려고 하고, 재고 따지고 간 보지 않고 다이렉트로 시원하게 표현합니다. 현아가 "언니가 몇 점짜린지 말해줘?"라고 도발했을 때, 삿대질하면서 싸우는 대신 지긋이 바라보면서 "왜 골질이야?(= 무슨 일 있어?)"라고 말할 정도의 애정과 배려심도 있어요. 굳이 선악으로 표현하자면, 선한 측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도 기정을 욕하면서도 계속 옆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창희(이민기 분)>는 세 남매 중 가장 타고난 기질이 단순하고 철없는(나중에 철드는)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딱히 불안정애착 유형이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아요.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어도 민감한 아이와 둔감한 아이의 세계관은 다르게 형성되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것, 자기 좋다는 여자들은 안 따지고 쉽게 사귀는 것에서 약간의 애정결핍이 의심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삶의 목적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아마도 창희에게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가족 같은 동네 친구들이 있어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기정과 미정도 그들과 같이 자랐지만 엄밀히 말하면 기정에게 그들은 동생의 친구들일뿐이고, 미정은 어릴 때 또래가 없어서 동네 바보랑 놀았다고 했지요.


창희의 결핍은 '촌스럽다'로 표현되는 열등감, 그리고 '깃발을 어디에 꽂을지 모르겠다'로 표현되는 삶의 목적입니다. 자기를 찬 여자가 당미역에 와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때, 창희는 '촌스럽다'라는 말로 건드려진 자존심을 신경 쓰고, '끌어야 할 유모차가 있는 여자'에게 그 유모차를 주지 못하는 신세에 좌절합니다. 그렇다고 정대리처럼 돈에 깃발 꽂고 죽어라 달리지도 못하고, 일을 열심히 해 보지만 딱히 이거다 싶지도 않고, 결국 승진도 못하죠. 유일하게 욕망하던 차도 얻고 났더니 이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국 창희는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자기 자리를 발견한 다음 해방됩니다(창희의 서사에 의미가 더 있어 보이지만 제 관심인물이 아니라서 더 깊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


그다음 우리 <미정이(김지원 분)>. 미정이는 I'm not ok, you're not ok (자기부정-타인부정)의 4유형입니다. '남들도 싫지만 나도 싫은' 이 유형은 세상을 살아가기가 가장 힘이 듭니다. 세상은 험하고, 나는 하찮은데, 의지할 사람은 없거든요. 미정이 돈 빌리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전남친과의 관계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돈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등신 같은 인간인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들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기 자신이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이지요.


미정의 두 번째 불행은 똑똑하고 민감한 아이였다는 거예요. 태어나보니 부모는 고된 노동으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욕망이 많은 언니와 철없는 오빠는 부모의 골칫거리였습니다. 미정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욕구를 깨닫기도 전에 집안의 공기를 읽고 타인의 욕구를 알아차리는 법을 터득합니다. 미정이가 똑똑하지 않거나 둔감했다면 그러지 못했겠지요.


미정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다녀오면 언니 오빠들이 놀러 나가기 바쁜 시간에 부모의 일을 도왔습니다. 어린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공장에 앉아서 몰딩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걱정해야 하는 일인데도, 삶에 지쳐 둔감한 부모는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합니다. 아니 사실은 자랑스러울 만큼의 관심도 두지 않았을 거예요. 수더분해 보이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다 큰 딸을 밤늦게 외지인 알콜중독자 집에 수시로 심부름 보낼 만큼 무신경합니다.


그래서 미정에게 삶은, 천둥번개가 쳐서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을 때 '드디어 끝나는구나' 하면서 차분해질 수 있을 정도로 무가치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버틸 뿐이죠. 오히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이상해요. 그래서 무리에 속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1대 다수에서 1인 느낌.


그래도 미정은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소몰이하듯' 삶을 끌고 갑니다. 하루에 몇 초씩 설레는 순간들을 수집해서 오분을 만들고, 그것으로 나머지 시간을 견디면서요. 아마도 그 원동력은 가족일 거예요. '엄마 아빠도 다 좋지는 않고'라는 말은, 안 좋은 일부분을 빼고는 좋단 뜻이죠. 애초에 어릴 때부터 수더분한 딸의 역할을 맡은 것도 부모를 위해서였을 테니까요. 언니와 오빠는 많이 싫지만, 언니가 자기 직장 사람에게 철 없이 고백하러 나가는 자리에서 밥 든든히 먹고 가라고 할 만큼의 애정도 있죠. 미정은 약하지만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질문 역시 가지고 있고요. 창희의 깃발이 삶의 목적이라면, 미정의 질문은 그보다 본질적인, 자신의 존재가치에 관한 것이고, 존재가치가 흔들려 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런 미정은 <구 씨(손석구 분)>를 알아봅니다. 구 씨는 미정과 똑같이 타인과 자신을 혐오하죠. 그러나 그는 미정과 다르게 한 발 한 발 삶을 끌고 나갈 약간의 의지조차 없어요. 겨우내 방구석에서, 혼자 다 치우지도 못할 양의 술을 마시며 지내다가 봄이 되자 제호네 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구 씨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할 일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는 것뿐이죠. 미정이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고 가족과의 연결고리를 바탕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죽음을 유예하는 삶을 산다면, 구 씨는 그를 붙들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한 발 한 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어요. 다행히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 속도를 늦추고 있을 뿐입니다.


일 없는 날 혼자 술을 마시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자다 깬 구 씨를 보고 미정은 직감합니다.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공장에 일도 없는 겨울이 오면 구 씨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게 되리라는 것을요. 마침 미정은 한 번도 채워지지 않은 삶에 진저리가 난 참입니다. 그래서 구 씨에게 '나를 추앙하라'고 합니다. 구 씨에게 할 일을 주면서 자기도 채워지는 전략적 만남을 제안한 것입니다(추앙 커플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습니다).


마지막 캐릭터는 <현아(전혜진 분)>입니다. 현아는 I'm not ok, you're ok (자기부정-타인긍정)의 3유형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고 끊임없이 남자를 만납니다. 하지만 병들거나 문제 있는 남자들만 만나서, 자신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을 때에만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때만 안심이 되거든요. 버림받지 않는다는 안심 말입니다. 자기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니까요.


반지하방에 살면서 편의점 알바를 하는 현아는 미정에게 밥을 쏘면서 '냉모밀 먹을 거면 스시도 먹으라'라고 합니다. 저는 이 대사가 현아라는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는 사랑받을 자신 없어서, 무의식 중에 끊임없이 남에게 베풀고 있어요. 현실에서 만나는 이런 캐릭터들 중에서는 허세가 심한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남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사람처럼 비춰야 되기 때문이죠. 밤마다 클럽을 전전하고 끊임없이 남자를 바꾸는 현아는 충동조절장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작가가 현아라는 캐릭터를 쓰는 방식이 흥미로웠는데요.

- 언니(기정)는 사람 점수를 매긴다

- 그 남자 문제 많지? 미정이가 그 남자 구하려고 그런 거 같은데

- 미정이는 우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아이니까

작가는 현아 입을 통해 이런 대사들을 읊으면서 주인공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설명합니다.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요.


지금까지 애착유형에 맞추어 인물분석을 해 보았는데요. 사실 사람은 몇 가지 유형으로 정형화해서 나눌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심리적 성향이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제 관점의 추측입니다. ^^


다음에는 추앙 커플에 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다음 글

https://brunch.co.kr/@mychoi103/165


매거진의 이전글 내 생애 최고의 기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