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 관하여 '한국인들이 인종 차별 훨씬 심하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분이 계셨어요. 말씀을 듣다 보니 아마도 가족 중에 외국인이 있으셨고, 그 분이 한국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하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께 답을 하려다가 글이 길어져서 따로 씁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겪었던 몇 번의 언짢은 일들이 명백한 차별이었는지 누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어요(아마 그중 적어도 한 두 번은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차별 그 자체보다도,
이것이 '차별인가 아닌가?'라고 곱씹으며 찜찜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상황에 대한 피로감, 그리고 그 상황을 분명히 이해할 수 없고, 문제제기도 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에서 오는 무력감 때문에 힘들 때가 간혹 있습니다. 이것이 '미국에서 영어 못하는 아시안 여성으로서 사는 삶'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여성'을 언급한 이유는, 제가 아무리 영어를 못하고 아시안 소수 민족이라 하더라도 남자였더라면 겪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신발을 사러 갔는데 원하는 사양을 잘 설명 못하고 버벅거리자 남자 점원이 'poor girl'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제 팔을 툭툭 치더라구요. 성추행까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힘 있다고 믿는 남자가 힘없어 보이는 여자에게 할 법한 행동'이었어요. 제가 남자였다면, 혹은 옆에 남자가 있었다면 그 사람은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언어차별, 인종차별, 성차별 이 셋 중에서는 언어차별이 압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을 굳이 차별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해요. 저만 해도 한국에서 일할 때 외국인들을 상대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말이 통하는 외국인과 그렇지 않은 외국인 중에서는 후자가 훨씬 힘들었어요. 제 컨디션이 좋고 여유가 있을 때에는 '말도 안 통하니 얼마나 힘들겠어' 하면서 더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지만, 늘 그랬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요. 그렇듯 내게 불친절한 외국인들은 그저 언어의 장벽으로 자신의 일이 과중되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럴 때 그걸 상대에게 여과 없이 표현하는 미성숙한 사람들은 어느 인종, 어느 성별이나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돈을 받고 균질한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소비자의 영어 능력, 인종, 성별 등을 보고 '만만한 고객'을 가려서 홀대하면 안 되지요. 비행기,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부러 안 좋은 자리에 배정하거나, 일부러 주문을 늦게 받거나, 말이 잘 안 통하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빨리 말하거나 하는 등의 행위가 그렇습니다. 이런 건 명백히 차별이고, 항의하며 시정을 요구할 일입니다.
차별은 한국인들이 훨씬 심하지 않냐... 맞는 말씀입니다. 특히 배우자나 가족 중에 외국인이 있는 분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이 겪는 차별(또는 역차별)에 분노해 보신 경험이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한국인들은 차별 이전에, 다인종 다문화 상황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요. 검은 머리에 흰 옷 입은,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만 모인 곳에서 수천 년을 살던 그 습성은, 한국이 글로벌 국가가 된 지 한참인 지금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실 변화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어요. 전란을 겪고 폐허가 된 국가를 지금의 세계경제대국으로 일으키는 데에 불과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여전히 한국에서는 미국이나 유럽만큼 다양한 인종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글로벌 도시인 서울의 번화가 한복판을 걸으면서 만날 수 있는 인종의 종류는 미국의 이름 없는 소도시에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인종의 종류보다 현저히 적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도 대부분은 아시아계, 일견 보기에는 한국인들과 큰 차이 없는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지요. 한국인들에게 아직도 다른 인종은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똑같은 인종, 똑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사는 삶은 안정감을 줍니다. 예전에 미국 교포이신 어느 분께서, 이민 2세인 자신의 딸이 한국에 가서 공항에 내렸는데 모두가 검은 머리인 것을 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서로 비교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죠. 누가 키가 더 큰지, 누가 코가 더 오똑한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가진 고유한 특성 중 하나 '남들과 비교하는 문화'는 상당 부분 단일민족이라는 점에서 기인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기에 (아마도 척박한 국토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견디면서 살아남기 위해 생겼을) 한국인들의 또 다른 특성인 '경쟁 문화'가 더해진 결과, 한국인들은 남들과 비슷하게, 너무 튀지 않으면서, 남들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합니다. 모두가 명문대에 사짜 직업을 얻으려고 공부하고, 늙어서도 젊음을 유지하려고 성형과 피부 시술에 돈을 쏟고... 한국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성공의 모습은 한 가지입니다. 같은 길을 추구하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거기서 남들보다 조금 더 나아가면서 우월감을 느끼죠.
게다가 '오지랖' 문화까지 더해져서, 한국인들은 남의 삶에 쉽게 간섭하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이번에 대학 어디 갔어? 결혼은 언제 하니? 살 좀 빼야겠다... 등등등. 외국에 오래 산 지인이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갔는데 친정어머님이 보자마자 "너 왜 이렇게 쪘어? 관리 좀 해야겠다."하고 외모지적을 하셔서 깜짝 놀랐다는 말을 듣고, 저는 더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친정엄마가 딸한테 그런 멘트 하는 게 하도 자연스러워서요. ㅎㅎ
사실 이 오지랖 문화는 어려울 때 서로 돕고, 남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정'의 문화와도 상통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것 때문에 한국인들은 남에게 무례한 행동을 쉽게 합니다. 그게 누구든 마찬가지이지만, 나와 다른 외국인이라면 더욱 시선이 가고 할 말이 많아지겠지요.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 익숙해지는 것, 저는 이것이 한국이 당면한 국가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미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 들어섰어요. 이미 오래전부터 글로벌 국가였던 데다가, 기록적인 저출산율 때문에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와 국제결혼 없이는 더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이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다문화가정 친구들도 많이 함께하고 있을 거예요. 그 아이들의 세상은 우리와는 좀 더 다를 겁니다. 그래야 하고요.
장황한 말씀드렸지만, 이 글을 쓴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도 좀 무례하고요. ^^;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 아직은 미성숙합니다. 그러니 외국인 배우자나 가족을 두신 분들은 한국에서 차별 (또는 역차별) 받는다고 너무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