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예스'로 대동단결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by 밍이

똑똑똑!

누군가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열어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다. 아이의 친구들이다. 이 동네 이 아파트로 이사 와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 이렇게 방과 후에 어느 집이든 할 것 없이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서로의 현관문을 노크하며 우르르 모인 뒤 실컷 뛰어논다는 점이다.


나는 '어릴 때는 놀이가 곧 학습'이라고,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실컷 놀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한국에 사는 한 그것은 내가 내 아이에게만 충분히 놀 시간을 허락한다고 해서 관철할 수 있는 철학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각종 학원스케줄로 어찌나 바쁜지 초1부터 놀이터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다. 덕분에 학원을 거의 다니지 않던 내 아이는 다른 친구들의 스케줄을 모두 꿰고 있다가 이 친구와 조금, 저 친구와 조금씩 근근이 놀이를 이어갔다.


그마저도 아이들이 커가면서 스마트폰을 하나씩 손에 쥐게 되자 같이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는 형태로 바뀌어갔다. 서울 학군지 한복판에 살면서 남들 다 보내는 학원 혼자 안 보내고 버티는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렇게 확보한 귀한 놀이시간을 기껏 휴대폰이나 보면서 지내는 것을 보고 이 에미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더랬지.


그런데 여기서는 초등 저학년 아이가 휴대폰 들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띈 적이 없다. 남자애들은 손바닥만 한 놀이터에서 하루에 네 시간씩 공을 차대고, 여자애들은 그네나 자전거를 타거나, 가끔씩은 차고에 모여서 춤연습을 하고 논다. 마치 매일같이 골목에서 고무줄과 공기놀이를 하고 놀던 나의 어린 시절처럼.


게다가 아이 말을 들어보면 어떤 친구는 공을 잘 못 차고, 어떤 친구는 금방 삐져서 같이 놀기 쉽지 않다 하던데, 그런 친구들도 서로 적당히 포용하면서 함께 어울린다. 영어를 못하는 친구들도 눈치껏 "예스, 노"만 하면서 따라다니면 얼추 끼워주는 모양이니, 누구 하나 따돌림 당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 역시 조금 부족한 친구를 '깍두기'라고 부르며 놀이에 끼워주던 우리 어릴 때 골목 문화 비슷하다(고무줄놀이에서 늘 내가 깍두기였던 건 비밀 ㅋ).


그러니 저 노크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아이 친구들. 그중 요새 학교에서 베프로 지내고 있는, 브라질에서 온 친구와 인도에서 온 친구였다. 우리 아이를 포함하여 이 셋은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함께 어울리며, 벌써 아이가 한국에 돌아가 이별하게 될 날을 걱정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아이는 마침 간식으로 먹던 팝시클을 입에 물고, 놀러 온 친구들을 따라나가려고 주섬주섬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나는 콩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엄마답게 아이 친구들에게 "너네도 팝시클 줄까?" 하고 물었다. 브라질 친구는 "Why not?"이라고 대답했고, 나는 그 아이 손에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인도 친구에게도 주려고 바라보는데, 세상에.... 나는 그토록 고뇌에 찬 열 살 아이의 얼굴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인도 친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마치 자신 안의 흑염룡과 전투라도 벌이듯 사력을 다해 고뇌하고 있었다. 친구 집에서 팝시클 하나 받아먹는 것이 이럴 일인가...;; 영겁(처럼 보인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인도 친구는 긴 고민에 종지부를 찍으며 "예스."라고 말했다.


나는 그게 너무 신기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얘기했더니, 미국에 오래 사신 분이 말씀하셨다. 미국에서는 인종도, 종교도, 문화도 너무 다양해서 아이들 중에서는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알러지가 있거나, 여러 이유로 집에서 금지한 음식들이 있단다. 그래서 한국처럼 쉽게 남의 집 아이에게 음식을 주면 안 되고, 사전에 먹어도 되는지 체크해야 한다고.


어이쿠,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아이의 또 다른,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친구는 라마단 기간이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더랬다. 인도 친구는 그 표정으로 짐작건대 알러지는 몰라도 집에서 못 먹게 하는 것 같던데.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며칠 뒤 스쿨버스에서 내린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브라질 친구와 인도 친구가 따라 들어왔다. 아이는 내게 "엄마! 오예스 있지?" 하면서 간식이 담긴 창고 문을 열더니 오예스를 하나씩 집어 친구들에게 던져주었다. (영어가 짧아 슬픈) 나는 다급하게 아이한테 '혹시 초콜릿 알러지 있는지, 엄마한테 허락받았는지 물어봐.'라고 말했고, 친구들은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나중에 들으니 아이가 학교에 스낵으로 오예스를 싸 가서 그 친구들에게 한입씩 나누어 주었는데 "아니 이 촉촉한 브라우니는 뭐지?" 하고 감탄하더니 방과 후에 쪼르르 쫓아왔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지... 아닌 게 아니라 미국 과자는 너무 맛이 없다. 칩 종류는 너무 짜고 기름지고, 쿠키 종류는 너무 달고 눅눅하다. 나는 한국에서는 나름 미식가를 자처하면서 무슨 베이커리의 무슨 빵 같이 유명한 디저트만 섭렵하고 마트에서 파는 공산품 과자는 입에도 안 넣었었는데, 미국에 오니 한국 과자처럼 맛있는 게 없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촉촉하고, 적당히 바삭거린다. 오예스도, 꼬깔콘도, 초코송이도 너무 맛나다.


얼마 전에는 같이 골프를 치던 분이 주신 과자를 한 입 먹었는데, 그 고소한 곡물맛과 혈관을 깨우는 달콤한 설탕맛에 심봉사 개안한 듯 눈을 뜨고 봉지를 보니 '오곡쿠키'였다. 한국에서는 마트에서 몇 개들이 세일로 매대에 쌓여 있어도 소 닭 보듯 지나간 것인데.


그 뒤 브라질 친구와 인도 친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다. 아이들에게서 "혹시 그 촉촉한 브라우니 좀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굽신거리는 눈빛을 볼 때마다 나는 있는 대로 나눠주었는데, 처음에는 귀엽게 보이던 것이 몇 날며칠 계속되자 슬쩍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간식 맡겨놨니 이것들아... 우리 애는 너네들 집에 가서 뭐 하나 얻어먹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나저나 남의 집에 오면 부모한테 인사 좀 해라 이것들아. 요새 한국애들 인사 안 해서 버릇없다 한탄하는데 미국 애들이 더하네그려.


심지어 어떤 날은 다 같이 놀다가 브라질 친구가 다리를 다쳤으니 봐 달라며 우리 집에 우르르 몰려왔는데, 일단 자기 집이 옆 동인데 우리 집으로 온 것도 이상했지만 아무리 봐도 다친 곳이 없었다. "이 친구 왜 데려왔어?" 하고 한국말로 소곤거렸더니 아이가 "사실은 간식 먹고 싶어서 온 거 같아."라고 대답하는 것이 참 웃기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했다.


먹는 거 하나 가지고 치사하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지 국제호구가 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별로다. 게다가 한국 과자 여기서 비싸다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에서 매번 장 본 걸 3층까지 들고 나르는데 갖다 놓는 족족 없어지는 것도 허탈하단 말이야. 결국 아이에게 선언했다. 당분간은 친구들에게 no more snack!

텅 빈 오예스 박스

얼마 뒤 아이가 다니는 미국 교회(주일 오전에는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미국교회 어와나 프로그램에 참석한다. 신앙과 영어를 모두 잡기 위한 치밀한 전략! ㅋ)에서 인터내셔널 행사를 한다는 공고가 떴다. 나라별로 부스를 만들어 자기 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행사인데, 전통 음식을 만들어 나눠줘도 된단다.


우리 집을 포함하여 어와나를 하고 있는 한인가정 다섯 집이 함께 행사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음식 만드는 건 너무 번거로우니 한국 과자나 좀 차리 놓기로 의견을 모았다. 미국에서 학교 행사 몇 번 뛴 경험상 다들 대충 하던데 너무 힘 빼지 말자구.


그런데 당일 행사장에 도착하니 어쩐 일인지 한국 부스의 자리가 행사장 정중앙에 떡하니 세 테이블이나 배정되어 있다?! 왜지? 우리 이 정도로 스포트라이트 받을 준비가 안 되었는데. ^^;


부랴부랴 테이블 한쪽에는 제기차기, 종이로 팽이접기 등 전통놀이 도구와 한국을 알리는 워크시트지를 늘어놓고, 가운데에는 태극기를 중심으로 한복 및 한국과 관련한 사진들을 전시하고, 다른 쪽에는 한인마트에서 사 온 꼬깔콘, 바나나킥, 자갈치, 오예스 등을 차려놓았다. 다행히 얼추 테이블 세 개는 메꿔졌다.


근데 우리 좌우로 대만 부스는 손수 만든 버블 밀크티를 따라주고 있고, 인도 부스는 커리 냄새가 요동을 친다. 슬쩍 둘러보니 싱가폴인가 어딘가는 접시 하나 가득 풀코스로 대접하는 모양이던데. 아아, 과자 부스러기나 갖다 놓다니 우리 너무 대충 차린 거 아닐까. 사람들이 와서 실망하면 어쩌지? 몸 둘 바를 몰라하며 하는 수 없이(?) 부스 한가운데에 아이패드를 세워 놓고 한국의 자랑 BTS 뮤직비디오를 무한재생으로 틀어놓았다. 미안하지만 이거라도 봐주겠니.


하지만 기우였다. 각양각색의 미국 아이들은 의외로 케이팝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한국 과자 부스에 줄을 서서 받아갔다. '촉촉한 브라우니'인 오예스는 금방 동이 나고, 다른 과자들도 다 떨어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중 어떤 아이는 부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리가 접시에 꼬깔콘을 새로 담을 때마다 족족 주워 먹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시식 기회를 방해했다;;; 결국 나중에 우리는 그 아이에게 다 먹은 꼬깔콘 봉지를 쥐어주면서 '뉴 그랜드 마트 가면 판다'고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ㅋ


그 모습을 보면서 오랜만에 아이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녀석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베풀고 살자.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브라질 친구는 '촉촉한 브라우니'에 대한 답례로 자기 엄마가 만든 브라우니를 키친타월에 싸 가지고 와서 내게 선물한 적도 있고, 케이크를 만들었다며 아이를 초대한 적도 있다. 인도 친구네 집에 가서도 뭔가를 대접받은 모양이던데. 아이가 두 집 음식 모두 맛없다고 잘 안 먹었은 것뿐이지 적어도 일방적으로 뜯기는 국제호구는 아닌 것 같아 안심이다.


오랜만에 아이 친구들이 집에 왔다. 아이는 마침 장을 봐 온 돼지바를 나누어 주었다. 인도 친구는 돼지바를 한 입 먹더니 그 특유의 고뇌에 찬 얼굴로 혼자 중얼거렸다. "Why is Korean snack so good?!"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남몰래 빵 터졌다. ㅋㅋㅋ


keyword
이전 16화한국 가고 싶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