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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Sep 03. 2024

미국 식당에서의 장애물 경주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필라델피아 여행 중 아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 나 게 먹고 싶어."


음식에 별 관심 없는 아이 입에서 뭔가 먹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일이 좀처럼 없기에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어떤 게?"

"있잖아. 예전에 홋카이도 여행 가서 먹었던 거."


아하, 해산물 뷔페에서 나오는 대게 다리가 먹고 싶은가 보구나.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당장 대게를 파는 곳을 알아보기도 어렵고, 판다 해도 여기서 파는 게 맛있을지 알 수도 없다.


고민하던 중 여행 오기 전에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볼티모어의 블루크랩 맛집을 보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어차피 삼박 사일의 연휴 중 필라델피아에서 이틀 밤을 자고 남은 하루는 어떻게 보낼지 아직 정하지 않은 터였다. 미국 동부에 온 지 6개월이 넘었건만 블루크랩도 아직 못 먹어봤고. 이번 기회에 볼티모어에 가서 하룻밤 자고 블루크랩을 먹어보는 게 어떨까?


"소망아, 대게는 아니고 블루크랩이라고 이 지역에서 유명한 게가 있는데, 그거 쪄서 파는 맛집이 있대. 거기 가볼래?"

아이가 좋다고 하길래 다시 물었다. 식당에 가는 것을 질색하는 아이라 거듭 확인이 필요하다.

"소망아, 식당 가서 먹는 거야. 괜찮지?"

"응."


이정도면 일부러 볼티모어까지 가서 '식당 가기 싫으니 호텔방에서 컵라면이나 먹자'는 소리는 안 하겠지. 얼른 호텔앱을 열고 볼티모어 이너 하버 쪽 호텔을 예약했다.

사실 식당이 불편한 것은 아이뿐만이 아니다. 나도 미국에서는 좀처럼 식당에 갈 마음이 나지 않는다. 미국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은 내게는 마치 장애물 경주를 연상케 한다.


먼저 식당에 도착하면, 한국처럼 불쑥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곳 아무데나 앉으면 안 된다. 웨이터가 와서 좌석을 안내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웨이터가 딴 일에 몰두하느라 나를 보지 못하더라도, 내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스몰 토크를 지나치게 오래하더라도, 그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안내된 좌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가게 안이 텅텅 비어 있는데 문 앞이나 화장실 옆에 앉힌다거나, 창가 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는데, 4인석이라 (너와 아이 단둘이는) 안된다고 답한 뒤에 다른 백인 두 명은 창가로 안내한다거나 하는 등. 그럴 때에는 '혹시 인종차별인가' 라고 생각했다가 '에이 설마.. 아닐거야. 사정이 있겠지...' 하고 부인하면서 하등 쓰잘데기 없는 내적 갈등을 겪어야 한다. 요새와서는 '다른 자리에 앉고 싶다'고 말하는 여유가 생겼지만 한동안은 그랬다.


그리고 나면 주문 받으러 올 때까지도 하세월이다. 한국처럼 "여기요!" 하면서 웨이터를 부르는 짓은 매우 무례한 것이다. 메뉴를 정하고 난 다음에는 메뉴판을 멀찍이 밀어놓고 딴 데를 보면서 온 몸으로 '나 주문할 준비 됐어요' 라는 기운을 풍겨야 한다. 무슨 판토마임 배우처럼.


드디어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면 다시 갈등이 시작된다. 음료를 음식과 같이 먹고 싶지만, 같이 주문하면 항상 음료부터 바로 나온다. 느끼한 서양 음식에 차가운 맥주나 소다를 곁들이고 싶어도 본 메뉴가 나올 때 즈음에는 이미 김이 다 빠진 채 미지근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한번은 주문하면서 '음식과 같이 주세요'라고 말했는데, 주문 받고 나서 주방으로 가는 동안에 까먹은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내가 되도 않는 요구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대번 음료부터 나왔다.


그렇다고 메뉴가 나온 뒤 음료를 주문하면 언제 갖다줄지 알 수가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음식을 다 먹고난 다음에 부른 배를 움켜쥐고 콜라를 들이켜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갈등하다가 항상 같이 시켜버리고 만다.


본 메뉴를 고르는 것도 고민의 연속이다. 미국 음식 1인분은 한국인 여자와 아이 기준으로는 1.5~2인분이다. 인원수대로 시키면 반드시 남는다. 그렇다고 두 명이 와서 1인분만 주문하면 웨이터가 '저 매너 없는 인간들..' 하며 혀를 끌끌 찰 것만 같다. 도저히 배가 불러서 못 먹겠을 때에는 '나는 이 지역 맛집을 두루 섭렵해야 하는 관광객이다'라는 느낌으로 '미안하지만 많이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조금 시킨 뒤 팁을 넉넉히 주고 나오지만, 웬만하면 인원수대로 주문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미국은 투고 문화가 보편적이라 먹고 남은 음식을 박스를 달라고 하기 쉽다. 하지퉁퉁 불은 파스타나 식어빠진 스테이크를 집에 가져가고 싶지는 않으므로, 메뉴를 선정할 때 하나 정도는 싸가기 좋은 메뉴를 선택하느라 머리를 써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음식이 맛이 있느냐 하면... 없다. 미안하지만 미국에서 6개월을 살아본 경험으로는, 뭐든지 다 한국이 훨씬 낫다. 한국에서 못 먹어서 그리울 거라고는 치폴레 정도? (근데 치폴레 왜 아직 한국에 안 들어왔나 몰라.)


다 먹은 뒤에는 아까처럼 '나 다 먹었어요'라는 기운을 마구 풍기면 드디어 웨이터가 와서 계산서를 준다. 그럼 이제 팁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아직도 팁 문화가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는 팁이 웨이터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므로 꼭 줘야한다고 말하지만, 일단 식당에 고용된 노동자인 웨이터가 일한 대가를 손님이 직접 지불하기로 하는 사회적 합의가 낯설다.


그리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면 제공한 노동에 상응하는 금액이 일정해야 하는데, 팁은 주는 사람 마음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주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미국의 요즘 시세는 대략 음식값의 20% 이상이고, 아무리 적어도 15% 이상은 주어야 되는 모양이다. 요약하면, 팁은 소비자가 자신의 받은 서비스의 가치를 평가해서 주는 것이라 주는 사람이 금액을 결정하지만, 그것을 너무 헐값으로 평가하면 무례한 것이다.


제일 이해 안 가는 것은 팁이 음식값과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기집처럼 (고기를 구워주는 등의)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면, 식당의 웨이터가 하는 일이란 자리 안내, 주문 받기, 음식 갖다주기, 계산서 주기가 전부이다. 그 수고는 음식이 한 접시에 백 불 짜리든 십 불 짜리든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내가 비싼 음식을 주문했다고 팁도 비싸게 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미용실 등 애초에 그 서비스 자체에 돈을 지불하도록 되어 있는 곳에서 팁을 요구하는 행위보다는 덜 난해하다)


이처럼 식당에서 무례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해야 하기에 나도 미국에서는 그닥 식당에 가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모처럼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이 생겼기에 흔쾌히 길을 나섰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캡틴 제임스'라는 식당에 도착했다. 선선한 바닷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입구에서 자리 안내를 기다리고 있으니 웨이터가 다가와서 오늘의 게 상태를 설명한 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앗싸! 얼마만에 가져보는 자리 선택권이냐. 아이와 함께 식당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바다가 잘 보이는 바깥자리에 앉았다.


조금 있다가 보니 웨이터가 우리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 보인다. 식당이 커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웨이터를 부르지는 않은 채, 그의 시야에 잘 들어오도록 머리를 길게 빼고 기다렸다.


웨이터가 겨우 우리를 찾아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새삼 한국 식당 웨이터들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한다. 손님이 아무 자리나 가서 앉는 것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면서, 들어온 순서대로 부리나케 달려가 물잔을 놓고 주문을 받는다. 생각해 보니 한국 식당에서의 서빙은 고난이도의 지적 노동이었구나.


먼저 블루크랩을 하프 더즌으로 주문했다. 모두가 칭찬하는 블루크랩 맛집에 찾아왔지만, 그 맛이 우리 한국인들이 기대하는 맛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오래 산 한국인들은 이미 입맛이 토착화되어 있어서, 그 분들의 추천은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이전 글에서 쓴 것처럼, 나 역시 미국에 온 지 6개월만에 한국에서는 입에도 안 댄 오예스, 꼬깔콘, 초코송이를 드링킹하고 있다. ㅋㅋ). 그분들이 '맛있다' 하는 것은 앞부분에 '미국치고는'이라는 말을 붙이는 편이 안전하다. 그러니 남들이 더즌으로 시키더라도 우리는 신중하게 하프 더즌으로 다.


대신 깔리마리 튀김도 추가했다. 내 경험상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가장 편차가 없이 무난하고 맛있는 메뉴는 이것이다. 게다가 남으면 포장해가기도 수월하다. 이걸 주문하면 게를 하프더즌만 주문한 것을 눈치보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아이를 위한 소다를 주문하고, 조금 망설이다가 IPA 생멱주도 한 잔 시켰다. 나는 크리스천이고 알콜에 약하기도 한 편이라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 않지만, 여행 등 특별한 날 한 잔 정도는 굳이 단념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 맛이 궁금하기도 하고, 아이와 처음 단둘이 여행하면서 쌓인 피로를 달래고 싶기도 했다.


주문을 마치고 한 숨 돌리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하늘 좀 봐!"


눈을 들어 보니 바다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풍경에 잠시 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미국 음식은 하나도 그립지 않겠지만, 눈부신 하늘만은 못잊을 것 같다. 그림 같은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만약 오늘 음식이나 서비스가 별로더라도 저 하늘값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있다가 역시나 음료가 먼저 나왔다. 생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는데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술맛을 잘 모르지만 이게 맛있는 맥주라는 건 잘 알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깔리마리 튀김도 나왔다. 사실 이 역시 노린 것이다. 어쩐지 빨리 나올 것 같은, 그리고 맥주에 잘 어울리는 안주 같은 메뉴로. 오늘의 선택은 성공이구만. 껄껄


그리고 한참 있다가 블루크랩 여섯 마리가 나왔다. 아이는 망치로 게를 부수는 게 신기한지 먹는 것보다 망치질에 더욱 열중한다. 나도 얼른 한 마리를 잡고 살을 발라낸 뒤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는 말했다. 어우 짜.


역시 그렇군. 인터넷에서 '라면 스프가루 같은 시즈닝을 듬뿍 뿌려준다'는 후기를 보았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가루를 잘 털어내고 계속해서 살을 발라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는 아까보다 낫다며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다. 귀여운 것,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은 봐도봐도 좋다는 옛 말씀이 이런 거구나.


하늘 한 번 쳐다보고 게살 한 번 발라내고 하면서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때가 되었다. 웨이터의 시선 사각자리에 앉은 탓인지 아무리 사인을 보내도 보지 못한다.


피로가 몰려와 더는 앉아있을 없어서 카운터로 갔다. '미안하지만 지금 가야 해서 여기서 계산을 해도 될까요?'고 물었더니 바로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계산서를 보니 직접 팁을 계산해서 적게 되어 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웨이터의 서빙은 그닥 만족스럽지 못했다. 음식을 갖다 주고, 맛이 괜찮냐고 물은 이후에는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목이 마르다며 음료를 더 주문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이고 있는 동안에는 친절하게 대했으므로, 딱히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애매하구나, 이 서비스...


팁 액수 하나 정하는데 '아메리카 갓 탤럳트' 심사위원처럼 웨이터를 평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웃겨서 평소에 주던대로 주기로 했다. 나는 보통 액수를 직접 계산해서 적어야 하는 경우에는 제일 단위에 20%를 곱해버리는데, 그러면 대충 17~19% 사이의 금액이 나온다. 에를 들면, 이번에는 음식값이 총 98.5 달러였으므로 90 달러의 20%인 18달러를 적었다. 팁 주느라 돈 쓰는 것도 아까운데, 정밀하게 퍼센트를 계산하느라 머리까지 쓰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솔직히 이 서비스가 18달러 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안그래도 아시안들이 식당에서 팁 적게 줘서 홀대받는다는 말도 있던데, 나 때문에 다음에 오는 한국인이 불이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그렇게 팁으로 18달러를 내고 난 뒤 '과연 잘한 걸까?'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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