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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Sep 07. 2024

아이와 단둘이 첫 여행, 필라델피아 (2)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여행 첫날.


운전시간을 줄이기 위해 전 날 미리 페어팩스에 있는 친구집에 와서 자고 8시쯤 일어났다. 아이는 여전히 꿈나라다. 아직 11세밖에 안 된 주제에 야행성인 아이는 밤에는 좀처럼 자지 않고, 아침에는 좀처럼 깨지 않는다.


푹 자야 컨디션 좋게 움직일 것 같아서 그냥 두고, 구글맵을 보면서 어디를 갈지 여기저기 검색했다. 나는 원래 타고난 성격은 J이지만 여행에서만큼은 P가 된다. 뭐든지 치밀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려 들면 자주 다닐 수가 없다. 나에게 여행이란, 마음 내킬 때 그냥 훌쩍~ 떠나는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출발 당일에서야 관광지를 검색하고 있지롱. 캬캬


대충 검색을 마치고 친구집에 풀러 놓은 짐도 다 싸서 차에 넣을 때까지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제는 슬슬 깨우지 않으면 안 된다. 휴일이니 더 자겠다는 아이와 실랑이하며 양치를 시키고 옷을 입히고 하는 통에 출발 전부터 지쳐버렸다.  


겨우 아이를 조수석에 앉히고 필라델피아로 출발했다. 그런데 페어팩스에서 분명 편도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건만, 가면서 시간이 죽죽 늘어난다. 연휴라 그런지, 비가 와서 그런지. 가다 보니 어디선가 사고도 난 모양이다.


막히는 도로를 오랫동안 운전하는 것도 피로하지만 그 시간 동안 아이가 계속 패드로 미리 오프라인 저장해 놓은 게임 유튜브를 보고 있는 것도 신경 쓰였다. 그만 보라고 잔소리를 하고 싶지만, 마침 오늘은 아이 생일이라 무제한 허락을 해 놓은 상태이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마음을 내려놓은 채 하나님이 아이의 눈을 보호해 주시기를, 아이가 게임이나 영상에 너무 탐닉하게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중간에 배고프다는 아이와 치폴레에 들러 점심까지 먹고 나니 오후 3시가 넘어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하늘은 우중충하고, 거리는 잿빛이다. 노숙자들은 여기저기서 돌아다니고 있고, 어디선가 대마초 냄새도 난다. 아이와 단둘이 여기를 온 것이 잘한 일일까. 왈칵 두려움이 몰려왔다. 당장이라도 리치몬드로 돌아가고 싶다. 익숙한 그곳에서 쨍한 햇빛을 쬐면서 수영장에서 뒹굴고 싶다. 하지만 이미 이틀 치 호텔비를 결재한 터라 어쩔 수 없다. 그동안 이곳을 즐겨보는 수밖에.


우리가 묵을 '메리어트 다운타운' 호텔방에 짐을 풀고 나니 거진 4시가 다 되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또 이리저리 검색해 보다가 눈에 확 띄는 걸 발견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매주 금요일에는 8시까지 야간개장을 한단다. 심지어 5시 이후 입장은 입장료도 반값에 주차료도 할인해 준다고 한다. 마침 오늘은 금요일이다. 얏호!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적지를 이곳으로 정했다.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에 아이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소망아, 일단 입장하면 한 시간 동안은 그림을 보는 거야. 너도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아보고 엄마한테 얘기해 줘. 그리고 나면 엄마가 게임시간을 줄 테니 앉아서 게임하고 있어. 그 사이에 엄마는 좀 더 보고 올게. 중간에 나가자고 조르지 않기야. 알겠지?"


경험상 아이가 미술관에서 버틸 수 있는 최대 시간은 한 시간이다. 이렇게 딜(?)을 하면 적어도 한 시간 반 이상은 볼 수 있겠지. 내가 게임시간을 더 주기만 하면 더 있을 수도 있다. 어차피 오늘은 게임 무제한 데이다.


입장하고 났더니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좇아가보니 어떤 밴드가 라이브로 재즈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사람들은 칵테일 잔을 들고 여기저기 계단에 걸터앉아서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혼자 왔더라면 나도 저 사이에 끼어 앉아서 느긋하게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있기에 시간에 쫓긴다. 일단 볼 것을 먼저 보기로 했다.


경비원에게 다가가 고흐와 모네의 그림이 어디 있는지를 물은 뒤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규모가 커서 고작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로는 다 볼 수가 없다. 게다가 미술관 전체를 한 바퀴 다 돌더라도 어차피 마음에 드는 것은 고흐,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일 것이다. 나 같은 미술문외한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인상파, 조금 더 나가면 야수파, 입체파 정도이다. 내게 그 이전 시대는 너무 지루하고, 그 이후 시대는 너무 난해하다.


전시관에 다다르자 모네의 그림이 먼저 눈에 띄었다. 모네 하면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본 수련 연작만 떠올렸는데 이것은 다른 풍의 그림이다.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면서 그림을 눈과 마음에 저장했다.

그 후 아이를 불러서 그림을 보여주면서 모네에 관해서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역시나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한 귀로 흘려듣는 듯 했으나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이 너의 무의식에도 남아있다가 먼 훗날 수면 위로 떠오를 날이 있을 테니.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이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너와 함께하고 있는 것만으로 엄마는 만족해.


다음 관으로 옮겼다. 이 미술관의 대표작,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는 관이다. 아이는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의자로 가서 주저앉았다. 야아, 이러기냐? 한 시간은 그림 보기로 했잖아. 아직 이십 분밖에 안 지났는데.


아이를 채근했지만 '피곤하다'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일단 내버려 두고 나나 관람하기로 했다. 아이에게 이 주위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겠다고 말한 뒤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는 자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런던 전시회에 대여 중이란다. 아쉽지만 뭐... 괜찮다. 이전 여행지였던 런던인가 파리에서 이미 여러 번 본 것도 같다.


계속 이어지는 전시관 통로를 따라 걸으며 인상파와 그 앞뒤 시대의 작품을 관람한 뒤 현대미술로 넘어왔다. 조금 있다가 보니 아이가 나를 찾아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손짓으로 아이를 부른 뒤 나란히 걸으며 그림을 보았다. 아이는 현대미술 작품 앞에서 미술문외한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감상평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건 나도 그리겠는데?"

어느새 시간을 보니 입장한 지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이는 약속대로 게임을 하겠다며 휴대폰을 달라고 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도하던 아이는 포기하고, 약속된 한 시간이 지났으니 이만 나가잔다.


아아...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금방 가기는 아쉬운데… 아이를 달래서 '한국 작품이 있나 찾아보자'는 핑계로 아시아관만 돌고 가기로 했다. 중국, 일본, 페르시아 등등을 다 돌다가 결국 고려청자와 조우했다. 남의 나라에서 만나는 청자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청자가 들어 있는 유리관의 벽을 손으로 쓰다듬고, 사진도 찍어본 후에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나가려고 입구 쪽으로 향하는데 아까 들었던 그 재즈 음악이 다시 들린다. 여전히 공연을 하고 있나 보다. 아아, 아쉽다. 저기 끼어서 나도 음악 듣고 싶은데... 호옥시나 해서 아이한테 "잠깐 음악 듣고 갈래?" 하고 물어봤다가 대차게 거절당하고 그냥 나왔다.


아이는 이제 숙소로 돌아갈 기대를 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계획이 하나 더 있다. 영화 '록키'의 배경이 된 그 미술관 계단에서 사진도 한 방 찍고, 록키 동상도 구경할 생각이다. 아이에게 말하니 '록키'가 뭐냐고 묻길래 인터넷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 보여주었다. 영화는 몰라도 그 음악은 알고 있던 아이는 신기했는지, 귀찮다고 투덜대면서도 시키는 대로 순순히 사진을 찍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원래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려다가 토큰을 사야 된다길래 귀찮아서 그냥 차를 가지고 나왔건만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시내에는 교통체증이 있는 데다가 도로가 좁고 신호등도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구글맵은 자꾸 폐쇄된 후문 쪽으로 안내를 하는 바람에 차를 댈 수 있는 정문으로 돌아들어가려다가 일방통행길로 잘못 들어가기도 했다. 나를 향해 울려대는 다른 차들의 경적소리를 들으며 길을 찾느라 식은땀이 났다. 다급해서 아이한테 기도하라고 하고, 나도 기도했다. 숙소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도 덕인지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어차피 길은 모두 이어져 있다. 그냥 좀 더 돌아가면 된다. 편안하게 마음먹고 일직선으로 주욱 달려서 한적한 곳까지 빠진 후에 다시 구글맵을 보고 찾아들어왔다. 휴우, 다행이다. 내일은 우버로 움직여야지.


저녁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숙소 앞 세븐일레븐에서 간단히 간식거리를 산 후 방에서 컵라면과 함께 먹었다. 그리고 잠시 휴식 뒤 취침.



[여행정보]

https://maps.app.goo.gl/Ng2WBui4CfkH5zzJA

https://maps.app.goo.gl/gmQS2jh7PgZ9n2S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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