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쯤 눈을 떴다. 오늘도 아이는 곤히 자고 있다. 가만히 두면 10시나 되어야 일어날 것 같다. 억지로 깨워서 데리고 다니면 종일 힘들다고 난리치겠지.
아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 활기차게 움직인다면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많을까. 잠시 상상하고는 아쉬워졌지만, 마음을 비우고 그저 지금 이 도시에 와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몇백 달러의 호텔비를 쓰고 장거리 운전을 했다는 사실은 애써 잊는다.
대충 씻고, 잠든 아이를 둔 채 방을 나섰다(※ 펜실베니아 주 법을 준수하였습니다). 우리가 묵는 호텔 바로 옆에 리딩 터미널 마켓(READING TERMINAL MARKET)이 있고, 아침 8시부터 문을 연다. 아이가 자는 동안 살짝 산책을 다녀올 생각이다. 사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이 호텔을 예약했다. ㅎㅎ 각종 투어 버스도 이 호텔 옆에서 출발하기에 맘먹으면 언제든 집어탈 수 있다.
마켓에 갔더니 이미 사람들이 꽤 있지만 붐벼서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점심 즈음부터는 인산인해라고 들었는데, 일찍 오기를 잘했다. 오바마가 다녀갔다는 필리치즈 스테이크 가게 Carmen과 아이스크림 가게 Bassetts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눈에 띄던 초콜릿 가게
나머지 가게 하나하나를 구경하고, 추천 받은 Miller's Twist 프렛첼 가게에서 레귤러 프렛첼과 시나몬 스틱을 샀다. 이제 다음 목적지는 La Colombe 카페이다. 여기 라떼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리딩 터미널 내에도 지점이 있지만 여기서는 라떼를 팔지 않아서 시청 쪽에 있는 가게로 가기로 했다.
터미널 밖으로 나왔더니 햇살이 눈부시다. 카페로 가는 길에 보이는 시청 건물도 밝게 빛나고 있다. 길을 따라 걸으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어제의 우울한 기분은 날씨 탓이었나보다.
햇살을 받고 걸은 때문인지 목이 말랐다. 원래 처음 가는 카페의 라떼맛을 제대로 보려면 뜨겁게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더워서 할 수 없이 아이스로 시켰다.
가게 안에서는 외부 음식 취식 금지일 것 같아서 가게 밖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프렛첼을 입에 넣었는데... 와우, 너무 맛있다. 걸어오면서 조금 식었을 텐데도 맛있었다. 반죽이 쫄깃한 것이 비결인가 보다. 순식간에 절반을 해치웠다. 커피도 꽤 마음에 들었다.
프렛첼을 씹고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나는 누구와 어디를 여행하더라도 이렇게 혼자 걷고 카페에 가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인데, 어쩌면 아이는 이런 나에게 최적의 여행 파트너인지도 모른다. 이제 꽤 커서 전화기만 쥐어 주면 혼자 호텔방에 두고 잠깐 나올 수 있으니. 나보다 일찍 깨서 밥 달라고 성화인 아이였더라면 이런 시간을 가지지는 못했겠지.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가니 아이는 이제 겨우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참이다. 프렛첼을 한 조각 떼어서 아이 입에 넣어준 뒤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의 첫 스케줄은 필라델피아의 역사유적지 투어. 독립기념관, 자유의 종, Declaration House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영어 투어밖에 없어서 조금 망설였지만, 미국 독립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도시를 방문했는데 그냥 돌아다니다간 건물 구경만 하고 끝날 것 같아서 과감히 신청했다.
12시에 Independence Visitor Center에서 시작하는 투어인데, 아이와 함께 가는 길이란 각종 변수(배가 아프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 등등)가 생기기 마련이어서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출발했더니 11시 40분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우처에는 센터 내 gift shop 옆에서 만난다고 되어 있는데, 아무리 봐도 가이드 같이 생긴 사람이 없다. 한국 같으면 누가 봐도 가이드 복장을 한 사람이 "무슨무슨 투어" 라고 씌인 안내판을 들고 돌아다니며 참석자를 확인할 텐데.
12시가 다 되도록 가이드를 만나지 못해서, 약간 프로페셔널한(?) 느낌의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붙들고 '당신이 가이드냐'라고 물어봤는데 다들 아니라고 한다;;; 알고 보니 비지터 센터 내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바우처를 들고 가서 등록을 하면 가이드에게 안내해 주는 식이였다. 야 이 미국놈들아, 일 이 따위로 할래? 바우처에서는 그냥 기프트샵 옆에서 기다리라고만 써 놨잖아. 때문에 5분을 지각했다.
다행히 가이드가 아직 출발하지 않아서 만날 수 있었다. 근데... 투어 신청자가 우리까지 포함해서 총 8명 밖에 안 된다? 영어 투어라 군중 속에 섞여서 눈에 안 띄게 들을 생각이었는데...;; 게다가 아시안은 우리 둘밖에 없고, 어린이는 우리 아이 한 명이다. 나머지는 브라질, 폴란드, 호주 등 다양한 나라에서 왔다던데 다들 백인에 영어능력자인 듯 하고.
어쩐지 전직 역사선생님처럼 생긴 가이드는 우리 둘을 보더니 눈을 빛내며 어디서 왔냐고 물으셨다. 코리아라고 했더니, 코리아가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막 설명하기 시작하신다. 그리고 뭔가 질문을 하는데 못 알아들은 나는 미국인들과 대화가 좀 길어질라치면 늘 하는 그 멘트, "쏘리, 아임 낫 굿 앳 잉글리쉬."를 외쳤더니, 영어를 못 하는 건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나도 한국어를 못한다고 하시며 또 계속 말을 이어가신다.
이크,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 투어 내내 이 선생님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날수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선생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슬며시 선글라스를 쓴 뒤 아이 뒤에 숨었다. 미안하다, 아들아. 네가 이 관심 좀 다 받아주렴. 그래도 너는 나보다 영어 잘 하잖아.
역시나 예상대로 선생님은 아이의 이름을 묻더니, 영어 이름이 Ryan이라고 대답하자 그 때부터 어딜 가나 Ryan! Ryan! 부르시면서 옆에 딱 끼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 같은 어린 세대가 미국의 미래라면서 (미안해요.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만...).
게다가 아이의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아주 천천히 쉬운 영어로 설명하시고, 중간중간 아이를 위한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으셨다. 조지 워싱턴 동상 앞에서는 '조지 워싱턴도 공부를 아주 싫어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해야 하니까 열심히 했지. 너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에미된 입장에서 아주 통쾌하기까지. ㅋㅋ (우리애 공부 안 하는 건 어찌 아시고?)
선생님이 마치 개인 튜터처럼 아이를 가르치시느라 원래 한 시간 반으로 예정되어 있던 투어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런데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기도 하고.
그리고 헤어질 때 선생님은 아이에게 '너 같은 아이를 두어서 너의 부모는 너무 행운이다'라고 말씀하신 뒤 한국어로 이름이 뭐냐고 물으셨다. 아이가 '소망'이라고 대답하자, 선생님과 투어참가자들 모두 각자 소!망! 하고 외친 뒤 투어 종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머나 먼 외국 땅에서, 이름도 모르고 다시 볼 일도 없는 외국인들이 내 아이를 아끼고 축복해 주는 모습에. 언젠가 나도 내 나라에서 이방의 어린아이를 만나면 환대해 주리라, 굳게 다짐했다.
투어가 나에게 감동을 남긴 것과는 반대로 아이에게는 피로를 남겼나 보다. ㅋㅋㅋ 두 시간 동안 영어로 역사 특강을 들었으니 그럴 만 하지. 아이는 '오늘은 더 이상은 무리'라면서 호텔에서 쉬겠단다. 안될 말이지. 일단 호텔방에 들어가서 잠시 쉬게 하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또 라면을 먹은 다음 살살 달래서 다시 데리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