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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Sep 10. 2024

아이와 단둘이 첫 여행, 필라델피아 (5)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셋째 날 아침.

오늘은 필라델피아를 떠나는 날이다. 어제처럼 아침 산책에 나섰다. 오늘의 목표는 Historical district. 어제 투어를 갔던 곳이다.


나는 혼자 외국 도시를 여행할 때에는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시내투어에 참가한다. 가이드를 따라 걸으며 설명을 들으면 그 지역 지리도 익히고, 역사와 문화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으며, 혹여나 내가 검색을 게을리해서 놓친 관광지도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중 마음에 드는 곳을 다시 찾아간다.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으며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른다. 투어에서는 미처 가지 못한 골목길 하나하나도 속속들이 찾아 누빈다. 그러고 나면 나는 그 장소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느낌이다. 나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이다.


오랜만에 혼자 여행하는 기분을 좀 누려보고 싶다. 게다가 어제는 영어 투어였던지라 하나라도 더 알아들어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바람에 정작 구경은 제대로 못한 느낌이다. 투어참가자들도 하나같이 얼마나 설명에 집중하던지, 사진 찍는 것도 괜스레 민망하더라.

Declaration House
Jewelers' Row District

호텔에서부터 길을 따라 걸으며 가까운 순서대로 하나씩 찾아보다가 자유의 종 있는 곳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줄이 길어서 안으로 들어가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기에 어제 투어에서는 바깥 유리창 너머로밖에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마침 개장시간 무렵 도착해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다. 얼른 줄 끝에 서서 따라 들어갔다.

미국 독립운동과 자유의 상징물을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미국인은 아니지만 감개가 무량하다. 이리저리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이번 여행에서는 내 사진을 하나도 못 찍은 사실이 생각났다. 애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틈틈이 애 사진을 찍느라 나까지 찍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조금 아쉬운 마음에 셀카라도 남기기로 하고, 사람이 별로 없는 종의 뒤편으로 돌아들어갔다. 팔로 휴대폰 카메라를 높이 쳐들며 셀카 포즈를 하고 있으니 옆에 있는 한 서양 여자가 자신이 찍어주겠단다. 친절한 사람 같으니.


나에게 휴대폰을 받아 든 그녀는 잠깐 만지작거리다가 "아무래도 10대가 찍는 게 낫겠죠?" 하면서 옆에 있는 아들에게 내 폰을 넘겨주었다. 저 여자 사진 좀 찍어주라는 말도 덧붙이면서. 매우 심드렁한 표정의 소년은 엄마와 나를 번갈아 흘긋 보더니 "NO."라고 말했고, 그녀는 민망한 얼굴로 다시 폰을 받아서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ㅋㅋㅋ 어느 나라나 10대 아들은 엄마 말을 안 듣는구만. 뭔가 묘하게 위안이 된다. ㅋㅋㅋ

다음 목적지는 Old City Coffee. 이름처럼 오래된 카페인데 라떼가 맛있단다. 호텔과 반대 방향으로 더 가야 해서 혹시나 그 사이 아이가 나를 찾을까 봐 조금 걱정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거의 내 키만큼 자란 아이인데 걱정할 게 뭐 있나 싶기도 해서 그냥 가보기로 했다.

카페에 도착해서 귀여운 간판을 발견하고는 한 장 찰칵. 홀밀크로 라떼를 주문해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모금 마시는데 눈이 번쩍 뜨인다. 맛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원두 때문인지 우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고소핫 맛이 일품이다. 아마도 창 밖으로 보이는 old town의 정취도 커피맛에 한몫했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피곤한 다리를 쉬다가 일어섰다. Elfreth's Alley가 근처에 있어 잠시 들렀는데 도착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이크, 아이가 일어났구나. 재빠르게 거리를 훑어보고 호텔 방향으로 뛸 듯이 걸었다. 성조기가 탄생했다던 Betsy Ross House는 못 보고 가네 싶어 아쉬웠는데 호텔 쪽 아무 방향으로 뛰어가던 길에 예상치 못하게 조우했다.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니.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밖에서 본 걸로 충분하다 싶어 얼른 호텔로 왔다.

Elfreth's Alley

일어난 아이가 뒹굴뒹굴하며 씻을 동안 체크아웃할 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어제 못 먹은 Bassetts 아이스크림과 Carmen의 필리 치즈 스테이크를 맛봐야 한다. 아이가 방에 있겠다기에 혼자 터미널로 갔다. 그래, 사람 엄청 붐빌 텐데 혼자 움직이는 편이 자유롭다.


Carmen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아 먼저 Bassetts로 갔다. 어느 후기에서 본 대로 제일 맛있다는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는데, 받아보니 밤새 보관을 어떻게 한 건지 아이스크림이 꽤 녹아 있어 실망스러웠다. 한 입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바나나 향이 나지 않는다. 맛있긴 하지만 뭐 특별할 것도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보다가 아이스크림 속에 후추처럼 박혀 있는 검은 점들을 보고 깨달았다. 이 사람이 나한테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줬네.

어떻게 하면 바나나와 바닐라를 착각할 수가 있단 말인가! 깊이 탄식하며 다시 한번 발음해 본다. 버내너~ 바닐라~ 음... 약간 헷갈릴 것도 같고...?


바나나로 다시 한번 주문할까 고민이 되었다. 필라델피아를 언제 다시 와 보겠어. 지금 못 먹으면 평생 못 먹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런 마음의 소리는 사실 어느 여행에서고 들리는 것이다. 그 소리가 이끄는 대로 다 따라가다가는 필경 다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짜고,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사게 된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지금 필리 치즈 스테이크도 먹어야 되고, 그게 아니라도 이른 아침부터 아이스크림 두 개는 무리다. 아마도 이곳의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평생 다시는 먹어볼 기회가 없더라도, 그게 그렇게 통탄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패스.


방에 있는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갖다 주고 다시 나왔다. 그 사이 Carmen은 문을 열었고, 내가 첫 손님이 되었다. 나는 재빨리 또 어느 후기에서 본 대로 제일 기본 메뉴에 양파, 버섯, 피클을 추가해서 주문했다. 어차피 메뉴판을 보면서 고민해 봐야 뭐가 뭔지도 모른다. 체크아웃 시간도 다 되었는데 빨리빨리 움직이자구.

포장된 음식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던 길에 중대한 실수를 깨달았다. 아이는 버섯을 먹지 않는다....... 으아, 어쩌지...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지 뭐.' 하며 대차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때로는 고단한 미국 생활을 버티게 해 주는 힘은 아메리칸 드림이나 프론티어 정신 같은 게 아니다. 바로 '에라, 모르겠다' spirit. 너무 잘하려고, 완벽하려고 애쓰지 말자. 그래봤자 대세에 큰 지장 없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외친다. 에라, 모르겠다!


의외로 아이는 (버섯이 들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꽤 잘 먹었다. 지금 아니면 한동안 밥 먹을 시간이 없어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다. 얼른 뒷정리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직원이 우리 차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렸다. 이 호텔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서 그런지 주차장이 복잡해서 100% 발렛파킹이다. 그런데 체크아웃 시간이라 사람이 한참 몰린 것인지 몇 십 분이 지나도록 차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난민처럼 호텔 입구에서 쭈그리고 앉거나 서서 자신의 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 생각을 못했네. 체크 아웃 전에 발렛파킹 부스 먼저 들를걸.' 나의 판단착오를 아쉬워하며, 팔짱을 끼고 짝다리로 서서 주차장 입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간의 주름이 깊어지고 인상은 험악해졌다.


그런데 한 여자가 내 앞을 가로질러 자기 차를 받으러 가던 중 몸을 돌려 내게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대충 알아듣기로는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입고 있네요. 당신 아들도 너무 잘생겼어요."인 듯하다.


엥? 내가 뭘 입고 있지? 내려다보니 Lifework의 로고가 그려진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가로수길 편집샵에서 산 아이보리색 점퍼스커트를 입고 키플링의 빨간 가방을 메고 있었다. 모두 한국에서 산 것들이다. 새삼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대체로 무채색의 티셔츠와 바지 차림, 간혹 온통 현란한 원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옷들이건만 이 사람들 속에 있으니 과연 세련되어 보이기는 한다. 국뽕이 차오르는구나. 솔직히 말해서 음식도, 쇼핑도, 뭐든 한국이 최고다.


그러면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밖에 서서 차를 기다리면서도 남을 칭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그녀에게 감탄했다. 기껏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잔뜩 인상을 쓴 내가 조금 민망해지기도. 얼른 표정을 풀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은 채 내 차가 주차장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여행정보]

https://maps.app.goo.gl/ETwYPoDKuVR6dAcu5

https://maps.app.goo.gl/uZGtWtznujWzjPXu5

https://maps.app.goo.gl/MX1SR5nxc8z9QZKD6

https://maps.app.goo.gl/RRt8jXbZpPV7ibMj8

https://maps.app.goo.gl/CDa6SksVqF39rkGv6

https://maps.app.goo.gl/1EREb1hJSdiGmpHH7

https://maps.app.goo.gl/ari1dLBVYCouSQY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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