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차를 받은 후 잠시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원래는 주일이라 근처 한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생각이었는데 차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예배시간은 이미 지나버렸다. 내가 필라델피아에 온 이유 중 하나인 반스 파운데이션은 예약을 늦게 하는 바람에 오늘 오후 3시 40분에 입장하기로 되어 있다. 그때까지 이 근처에서 버텨야 하는데...
미사 시간이 맞는 성당이라도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이미 차도 받았고 성당에 가기 위해 새로 주차자리를 찾아보기도 힘들 것 같아 예배는 저녁에 인터넷으로 드리기로 하고 관광에 나섰다.
먼저 UPEN. BOOK STORE 근처 스트릿 파킹장소에 차를 세웠다. 돈 내고 하는 스트릿 파킹은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기계 작동이 쉬워서 다행이었다. 으리으리한 서점 안을 구경하고 기념품으로 볼펜과 연필을 몇 자루 산 다음 그 유명한 와튼 스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록빛 가로수들이 줄지어 있는 학교 건물들 사잇길을 걷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신기하게도 대학교 교정은 그 안을 걷는 것만으로도 뭔가 젊은 학생들의 생동하는 기운을 나눠 받는 느낌이 든다.
드디어 와튼 스쿨을 발견했다. 아이에게 "저게 미국에서 제일 좋은 경영대학원 중 하나야. 우리나라에서도 저기 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엄청 많아."라고 설명해 주는데 역시나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지난번에 보스턴에 가서도 대학교를 가지 않았냐고, 다 똑같은 학교인데 왜 자꾸 오냐고 투정이다.
에혀... 학교 건물을 보고 두 주먹 꼭 쥐며 "어머니,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이 학교에 진학하겠습니다!"라고 당찬 포부를 밝히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순순히 보고 들으면 안 되겠니. 암튼 건물 앞에 아들놈을 세우고 사진을 한 방 박아보기로 한다. 먼 훗날 이 사진을 찾아보면서 "어머나, 내가 어릴 때 우리 학교 앞에 왔었잖아?"라고 놀라는 일이 혹여라도 있기를 바라면서. 캬캬
유펜을 대충 돌고 LOVE 조형물 앞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아직 1시 반밖에 안 되었다. 이제 어디를 가면 좋지... 아이에게 물어보니 동물원에 가고 싶단다. 전날에 필라델피아에서 가볼 수 있는 관광지 여러 곳을 설명하면서 동물원도 있다고 말해둔 터였다.
지금 동물원에 가면 시간이 너무 애매한데... 하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동물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구경하다가 반스 입장 시간이 되면 우버로 얼른 다녀와도 될 듯하다.
하지만 동물원 매표소 앞에 서서 티켓팅을 하면서, 나는 어쩌면 오늘 반스에 못 갈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주차를 마치고 매표소 앞에 서니 이미 2시가 넘어 있었다. 반스 입장시간에 맞춰가려면 한 시간 안에 동물원 안을 다 돌아야 한다. 입장료와 주차비로 총 62 달러를 결제했는데 한 시간 있다가 나가기는 너무 아까운 짓 같다.
게다가 동물원을 관람하려면 야외에서 많이 걸어야 하는데, 오늘 날씨는 후덥지근한 데다가 나는 이미 시작도 전에 지쳐 있었다. 예전에 혼자 런던이니 파리를 여행할 때에는 하루에 삼만 보도 거뜬히 걸었는데 오늘은 왜 이리 체력이 빨리 떨어졌나 했더니, 그 새 내가 나이를 먹은 것도 있지만 어젯밤에 수영을 한 탓이 큰 것 같다. 동물원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미술관 안에서는 기어 다닐 힘도 없을 것 같구나.
아아... 나 반스 가려고 필라델피아 온 건데... 이박 삼일이나 있었으면서 반스를 못 가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가볼까 했지만, 동물원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생기가 돌면서 여기저기를 탐색하는 아이를 보니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래, 저렇게 좋아하는데 충분히 즐길 시간을 주자. 나는 언젠가 또 여기 올 일이 있겠지.
아이에게 '미술관은 가지 말고 동물원에 있고 싶은 만큼 있자'고 말했더니 뛸 듯이 기뻐한다. 나도 마음을 비우니 관람이 즐거웠다. 저 뿔소는 뿔이 어떻게 저렇게 크게 달렸지? 기린은 전에도 봤을 텐데 꼭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하네. 연신 감탄을 하면서 아이와 함께 천천히 둘러보다가 나왔다.
이제는 볼티모어로 출발. 두 시간 동안 운전해서 가야 하는데, 이미 피로에 지친 터라 졸음운전을 할까 봐 걱정이다. 아이와 단둘이 여행하면 이게 어렵다.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운전을 교대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하지만 생각해 보니 부부 둘 중에 한 명이 운전을 못하는 집도 많다. 리치몬드에서 친하게 지내는 한인 가정이 넷 있는데 그중 세 집이 부부 중 한 명만 운전을 한다.
그러니 나약한 소릴랑 집어치우고 힘내서 가 보자구! 먼저 졸지 않을 방법부터 찾아놓고서. 카페인에 예민한 몸이라 저녁이 다 된 시간에 커피를 마셨다가는 밤을 꼴딱 새울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대신 어제 레고 전시회에서 산 블럭 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차를 몰았다.
두어 시간 뒤 볼티모어의 이너하버에 도착했다. 먼저 체크인을 하고, 프론트 직원의 안내에 따라 파킹 어플로 결제를 한 뒤 호텔과 붙어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미국은 어딜가나 주차자리가 널럴하다고 생각했건만 그건 내가 사는 소도시나 그런 모양이다. 뉴욕도, 보스턴도, 필라델피아도 호텔마다 주차료를 따로 받는데 깜짝 놀랄만큼 비싸다. 그에 비하면 그나마 볼티모어는 저렴한 편이지.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가 (이전 글에서 쓴 대로) 블루크랩을 먹으러 다녀왔다. 돌아와서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던 아이가 "이 호텔도 수영장 있어?" 하고 물었다.
없다, 없어. 있어도 없다. 오늘도 수영을 했다간 엄마 진짜 기절할지도 몰라. 아이에게 '없다'고 대답하고선 나도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며 내일의 스케줄을 짜 보기 시작했다. 볼티모어에서 제일 보고 싶은 건 볼티모어 뮤지엄과 피바디 도서관. 혹시 인터넷으로 시간 예약을 해야 하나 싶어서 검색해보는데... 으아! 내일 다 휴관이네!!!
아아, 나 뭐한 거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블루크랩만 먹고 리치몬드로 돌아가도 되었을 텐데. 왜 굳이 여기에 숙소를 잡은 거람... 이럴 때에는 미리미리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지 않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하지만 진정하기로 했다. 여행이란 원래 온갖 시행착오로 점철된, 비효율적인 것이다. 효율만 따지면 집에 있는 게 제일이다. 괜찮아, 이 김에 볼티모어에서 하루 묵어보는 거지 뭐. 나 자신을 다독이면서, 이박 삼일간 아이를 잘 데리고 다닌 나의 수고를 칭찬하고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잠이 들었다.
https://maps.app.goo.gl/FaTtxqdxVsL1wHz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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