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목적지는 더 프랭클린 인스티튜션, 과학박물관이다. 토요일인 오늘 본관 전시는 5시에 문을 닫지만 "The Art of the Brick"이라는 이름의 레고 전시회는 8시까지 한다고 한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이미 4시. 본관 전시를 볼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일단 눈에 띄는 아무 전시실로나 뛰어들어갔다.
그곳에는 우주에 관하여 배울 수 있는 여러 아이템들이 있었는데, 아이는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나에게 "엄마, 이건 뭐야?", "엄마, 저건 뭐야?" 하고 물었다.
거기 설명 적혀 있잖니. 네가 읽어보지 그래. 했더니 귀찮아서 싫단다. 에혀... 그냥 냅두고 싶지만 입장료가 아까운 K엄마는 하는 수 없이 파파고를 돌려서 설명서를 읽고 해석해 주었다.
아이는 구슬이 궤적을 그리는 모형 앞에서 멈추더니 한참을 가지고 놀았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얼른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고 재촉하고 싶지만, 아이의 주도적인 놀이를 방해하면 안 된다. 아이가 무언가를 탐색할 때에는 충분히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런고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5분 정도 기다렸다가, 끝날 기미가 없자 결국은 "딴 데도 가 보자."며 잡아끌었다. 이 정도도 K엄마 치고는 많이 기다린 거라구.
5시까지 촉박하게 본관을 구경한 후 바로 레고 전시실로 들어갔다. 첫 번째 관에서는 뭉크의 '절규'룰 비롯한 많은 미술품들을 레고로 구현해 놓은 작품들이 보였다. 아이는 이를 보고 낮게 탄식했다. "이건 미술관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못 들은 채 하고 관람에 집중하는데 역시나 아이는 내 소매를 잡아끌며 빨리 보고 나가자고 성화다. 나 역시 활동적인 아이가 지겨움에 몸부림치다가 혹여 레고 작품을 쳐서 부술까봐 걱정이 되어 재빠르게 눈으로 훑으며 관람을 마쳤다.
마지막 관에 이르렀더니 레고를 조립할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레고 피스들을 손에 쥐고 작품세계에 심취해 있다. 아이는 잠시 숨을 멈추고 쳐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엄마, 우리 시간제한 있어?"
아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이는 여기서 한동안 레고 조립에 빠져들 모양이다. 나는 "없어, 없어. 만들고 싶은 거 실컷 만들어."라고 말한 뒤 아이가 조립을 시작하자 "엄마는 잠깐 아까 못 본 거 좀 보고 올게." 하며 다시 전시관을 향해 백스텝으로 뒷걸음 쳐들어갔다. 그 뒤 방해 없이 작품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했다.
다 보고 돌아왔는데도 아이는 여전히 레고에 심취해 있다. 나는 뒤편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보챌 차례다. 아이에게 "이만 갈까?" 하고 물었더니 아직 한참 남았다며 "엄마도 레고 만들어."라고 한다.
엄마는 레고에 영 흥미가 없다구. 생각만 해도 지루해서 몸부림칠 것 같다... 고 생각하다가 새삼 깨달았다. 엄마가 너를 미술관에 끌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보라고 할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새삼 미안하네 그려.
그 뒤로도 한동안 더 있다가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전 글에 쓴 대로) 다음날은 게를 먹으러 볼티모어에 가기로 하고, 오늘 저녁은 뉴욕에 못 가는 대신 필라델피아 한식당에서 순두부를 먹기로 정했다.
즐겁게 레고를 마치고 신난 아이와 조잘조잘 떠들며 한식당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아무리 봐도 한국인처럼 보이는 주인이 "How many? (몇 분이세요?)" 하고 물었다. 갑자기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우리가 한국말을 쓰는 것을 들었을 텐데 굳이 영어로 묻다니. 괜히 한국인이라고 아는 척하지 말라는 건가.
나 같은 단기 거주자가 미국에서 비싼 돈을 내고 한식당에 가서 기대하는 것은, 단지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깔리는 각종 밑반찬이나 차가운 보리차만은 아니다. 타향살이에 알게 모르게 지쳐 있다가 우연히 만난 고국 사람들끼리의 서로를 알아보는 반가운 눈인사, 그리운 모국어를 사용할 때의 친숙하고 편안함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 식당에서는 단념해야겠구나. 메뉴를 보면서 영어로 주문할 준비를 한다. 일단 아이를 위한 순두부는 토푸 스튜... 그리고 나를 위한 메뉴를 고심하다가 돌솥비빔밥을 골랐다. 나물이야말로 미국생활하면서 제일 해 먹기 힘든 데다가 돌솥은 보기도 어렵다.
그런데 주문을 받으러 온 분이 반갑게 웃으며 한국말을 건넸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헤실 풀렸다. 게다가 눈앞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는 뜨거운 돌솥비빔밥에 고추장을 휘휘 둘러서 비빈 뒤 한 입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이상하게도 미국에서는 매운 음식을 먹어도 몸 안 어딘가에 느끼한 기운이 남아 있는데, 느끼함을 싸악~ 잡아주는 맛이다.
순두부는 또 어떻고. 그닥 손님 없는 차이나타운 안의 한식당이라 별 기대 없이 먹었는데 뉴욕의 순두부처럼 맛있다. 미국 순두부 도대체 무슨 일이냐구요. 콩 품종이 다른 건가? 누구라도 붙잡고 진지하게 묻고 싶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안녕히 계세요!" 큰 소리로 인사를 한 뒤 나와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샤워를 하고 느긋하게 쉬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면 좋겠건만... 아직 숙제가 하나 남아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이에게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도 스케줄에 넣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아이는 수영을 골랐다. 메리어트 다운타운 안에는 수영장이 있다. 이 호텔을 고른 또 하나의 이유이다.
혹여나 해서 아이에게 "피곤하니까 수영은 건너뛰고 쉴까?"라고 말해봤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하긴...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싸돌아다닌 에미와 달리 야행성인 아이는 오전 10시까지 푹 자고 이제 본격적으로 놀 시간이다.
하는 수 없이 수영복을 챙겨 입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필라델피아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의 수영장이란 역시 손바닥만큼 작아서, 그전에 갔던 각종 리조트 수영장들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해 보인다. 다시 한번 "수영장 별로인데 그냥 갈까?" 하고 말해보았지만 아이는 단호히 거절한 뒤 풍덩~ 뛰어들었다.
어디서나 물만 만나면 물고기처럼 되어 신나는 아이를 보니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다. 약속대로 나도 슬금슬금 물에 들어가 아이와 함께 놀았다. 내가 왜 칸쿤도, 버지니아 비치도 아닌 필라델피아에서 수영을 하고 있나...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왜 아이를 하나만 낳아서 이 고생인가, 형제가 있으면 둘이 놀라고 했을 텐데...라고도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이가 여럿이라고 언제나 둘이 잘 논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이 생각도 접어둔다. ㅎㅎ)
그리고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와 푹 쉬고... 싶었으나 마지막까지 정신줄을 놓지 않고 아이의 큐티책을 펼쳐 들었다. 나는 어딜 가더라도 아이의 큐티책은 꼭 챙겨가지고 다니는 편이다. 기초를 단단히 쌓으려면 뭐든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게 제일이다. 매일 큐티책을 읽히면 신앙도 길러지고 문해력도 향상된다. 그 덕분인지 내가 주위애서 본 애들 중 제일 책을 안 읽는 것이 우리 아들이건만 문해력은 괜찮은 편이다.
"놀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라는, 매번 여행 갈 때마다 하는 투정을 물리치고 아이를 어르고 달래 큐티까지 마친 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