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휴우, 청소를 마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흰 색의 벽에는 얼룩 하나 없다. 아파트 계약을 할 때 보증금을 내고 나중에 돌려받는 방식 대신 보험을 드는 것으로 했더니 인스펙션은 면제받았지만, 그래도 집을 더럽게 쓰면 나중에 이 아파트에 입주할지도 모를 한국인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싶어 최대한 깨끗하게 치웠다. 아마존에서 매직 블럭까지 주문해서 매의 눈을 하고 더러워 보이는 곳마다 박박 닦았더니 손목이 시큰거리지만, 얼룩 한 점 없(어보이)는 집 안을 둘러보니 만족스러웠다.
소문으로는 몇 년 전 버지니아의 한 아파트에서 한국에서 단기로 온 세입자가 보증금을 다 못 돌려받자 앙심을 품고 집에 수도를 틀고 나가는 바람에 집이 다 망가졌단다. 그 동네 한인들은 한동안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지. 나는 나 개인일 뿐이지만 외국에 있으면 원치 않아도 내 나라, 내 민족을 대표하게 되는 일이 잦다. 그래서 가끔은 괜시리 어깨가 무거워지곤 한다.
청소를 마친 카페트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휴대폰 사진첩을 들여다보았다. 어젯 저녁에 동네 산책을 나섰다가 대단한 노을을 보았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미국의 하늘은 언제 보아도 예쁘지만, 어제 저녁의 풍경은 정말이지 말을 잇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 곳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주시는 선물 같다. 내가 미국에서, 이 아름다운 동네에서 10개월을 살았다니... 꿈만 같다. 한국에 돌아간 후 나는 얼마나 이 곳을 그리워하게 될까.
조금 있다가 언제나 그렇듯 학교를 마친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이 왁자지껄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오늘은 목소리 톤이 다르다. 역시나... 마지막 날이라고 아이들은 한데 엉켜서 울면서 오고 있었다.
I'll miss you, Don't forget me...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한 목소리로 수없이 되뇌이는 그 말에 나도 울컥해서 눈물이 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 온 작별 선물들을 바라보면서 '짐을 다 쌌는데 저건 어디다 욱여 넣지;;'라는 생각도 5% 정도 들은 나는 T인가! ㅋㅋ)
내일 오전에 워싱턴에서 비행기를 타는 스케줄이라 오늘 저녁에 페어팩스에서 차를 팔고, 근처에 있는 친구집에서 자기로 했다. 그래서 아이 하교 후에 바로 떠나야 하는데 슬픔에 잠긴 아이들은 서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결국 한 시간을 더 지체하면서 작별인사를 수없이 되풀이한 뒤 출발할 수 있었다.
중고차업체에 차를 넘기고 친구집에 오니 버지니아에 도착했던 첫 날이 생각났다. 그 날도 이렇게 친구집에으로 먼저 왔었는데. 아이의 교육에 관하여 수많은 고민을 안고 떠났던 미국행, 나는 그 답을 찾았나.
여전히 답이 무언지는 모르겠다. 한국의 과열된 입시제도에서 아이를 빼내어 미국에 온다 한들 여기에는 또 여기만의 어려움이 있다. 아이의 성향, 가족의 미래를 생각하면 무엇이 더 낫다, 못하다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그 답은 내가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발견해 갈 것이고, 부모인 나는 옆에서 균형잡힌 시각을 유지하면서 때에 따라 필요한 도움을 줄 뿐이다.
다만 아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한국이라는 장소적, 문화적 한계를 뛰어넘어 전세계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돕겠다는 다짐은 들었다. 그것이 내게 지난 10개월의 미국생활에서 아이 교육에 관하여 얻은 수확이다.
친구네 가족과 저녁을 먹고 늦게까지 수다를 떤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생각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부리나케 트레이더 조에 달려가 마지막 쇼핑을 하고 ㅋ 공항행. 대한항공 카운터에 와서 한국말 안내를 들으니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 싶은 아쉬움과 모국어 환경으로 돌아간다는 편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영혼까지 끌어모으는 느낌으로 탈탈 턴 마일리지를 써서 비즈니스 석에 올라 탄 뒤, 15시간 동안 기내식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사육의 시간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민가방에 캐리어 몇 개를 이고지고 나왔더니 마중나온 남편의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이와 나는 (기내에서 그렇게 먹었으면서도!) 배달어플부터 켜고 뭘 먹을지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드디어 배달문명의 세계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내가 먹고 싶은 것,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을 각자 다른 음식점에서 배달시켜먹는 호사를 누리고, 오랜만에 가족끼리 즐거운 수다타임을 보내다가 잠이 들었다. 내 집, 내 침실이 얼마만인지.
다음 날 눈을 떴다. 여긴 어디인가. 그리운 한국의 내 집이로구나.
미국 생활을 떠올려보았다. 한바탕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 그동안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시리즈를 사랑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