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Mar 26. 2021

앙리 마티스와 보건교사 안은영

오전 10시. 지하철 삼성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빠져나왔다. 휴가를 내고 '앙리 마티스 특별전'에 가는 길이었다.


꼭 보고 싶은 전시는 아니었지만 몇 달 전에 얼리버드 이벤트로 사둔 표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다간 전시기간이 끝날 판이었다.


엊그제 슬픈 일이 있어서 기분이 매우 쳐진 상태이기도 했다. 이대로 출근해 봤자 하루 종일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모니터만 응시하면서 긴 상념에 젖을 게 뻔했다. 이참에 나를 위로할 겸 전시회나 다녀오자 싶었다.


네이버 지도를 보면서 걸어서 '마이아트 뮤지엄'을 찾았다. 지하였지만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입구 쪽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푸른 바탕에 검은 사람 작품은 미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낯이 익은 유명한 것이었다(제목이 '아카루스'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전시회에 대한 기대감이 들었다.


그 옆 포토존은 액자에 넣어져 걸린 자잘한 그림 몇 점과 연지색 패브릭 소파로 꾸며져 있었는데 아늑하고 다정한 느낌을 주었다.


'소파 위에 앉아 셀카라도 찍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길에도 슬픈 생각을 했더니 이미 눈자위가 빨갛게 젖어 있었다. 마스크가 일상화되는 바람에 아침 댓바람부터 눈물 그렁그렁한 표정을 지하철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지. 이 몰골로 찍은 셀카 따위는 괜히 스마트폰 갤러리 한 구석을 차지하다가 결국 삭제될 운명일 게 뻔했다.


입장한 다음 찬찬히 그림을 둘러보았다. 이카루스와 비슷한 풍의 작품들 여러 점이 눈에 띄었다. 컷 오프라는 기법을 사용했다지. 예쁘고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컷 오프래봤자 종이 오리기 아니야? 우리 집 아홉 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마티스가 들으면 무덤에서 관 뚜껑 열고 뛰쳐나올만한 생각이겠지만 내가 추상미술(내 기준에 사실적이지 않은 그림을 의미함)을 보는 관점이란 게 고작 그 정도라서(미술학도 여러분께 정중한 양해를 구한다).


피카소도, 잭슨 폴록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들어서' 알 뿐 왜,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보지는 못했다. 어쩌면 마티스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가위로 색종이 오리는 법을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우리 집 아홉 살의 작품과 마티스의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비견하면서 관람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동선이 끝나버렸다. 작품수가 많지는 않았다.


나 같은 미술 문외한이 미술관에 오는 이유는 그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예쁜 것들을 '잔뜩' 보기 위함인데. 앞선 조건들은 괜찮았으나 '잔뜩'이라는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 가서 자주 느낀, 고기 먹다 끊긴 것 같은 기분. 강남에 있는 미술관들은 땅값이 비싸서 그림 대여에 돈을 많이 치르지 못하는지도 몰라.



전시장을 한 바퀴 더 휘휘 둘러보고 나왔다. 휴가까지 냈는데 그냥 집에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코엑스몰에 가기로 했다.


내게 그 장소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젠가 성공해서 입성하고픈 곳'이었다. 대학 시절, 인천에서 서울까지 하루 네 시간을 왕복 통학하면서, 매일 학비를 벌려고 과외 알바를 뛰면서 짬짬이 당시의 남자 친구와 코엑스몰에서 데이트를 했다. 동갑내기이지만 집안이 부유해서 알바 따위 할 필요가 없었던 남자 친구는 영화비와 식사비까지 기꺼이 혼자 부담하곤 했지만, 자기 동네를 벗어나는 것은 싫어했다.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보고, 푸드코트나 크라제버거, (가끔 특별한 날에는) 마르쉐나 T.G.I. 에서 밥을 먹고 나면 남자 친구는 근처에 있는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나는 그때부터 새로 인천까지의 긴 여정을 떠나야 했다.


지하철 2호선에서 직장인들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부대끼다가 신도림역에서 인간 파도에 휩쓸려 겨우 1호선으로 갈아타고 부평역에 당도한 다음에도 다시 이삼십 분에 한 대 오는 마을버스를 기다릴 때면, 내일 아침 다시 또 이 길을 거슬러 학교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득했다.


'나중에 성공해서 꼭 코엑스몰 옆에서 살 거야. 토요일에 심야영화를 보고 제 발로 걸어서 집으로 갈 거야.' 이런 소망으로 버티던 날들 끝에, 코엑스몰 근처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꿈꾸던 것과 비슷한 삶을 살게 된 지금에도 그곳은 특별했다. 거기 가면 예전의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변해도 너무 변했다. 예전에 있던 그리운 가게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전에도 아이를 아쿠아리움에 데리고 오기 위해 몇 번 발걸음을 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차를 가지고 와서 아이 수발들다가 금방 가버리는 바람에 구석구석 꼼꼼히 보지 못했기에, 뭔가 옛 정취가 느껴질 만한 것이 아직 남아있을 줄 알았건만. 변하지 않은 것은 메가박스뿐인 것 같았다.




한참을 여기저기 더듬거리며 걷다가 내가 매우 피로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사실 아까 미술관에서부터 힘들던 참이었다.


나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기분전환용 외출'을 선택했건만 나의 몸은 휴식을 원하고 있었나 보다. 사십 대 워킹맘은 70대 노인보다도 저질체력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몸에서 힘을 쭈욱 빼고 소파와 일체가 되어 재미있는 소설이나 읽으며 깔깔거릴걸 그랬어. 좀 있으면 애 학교에 데리러 갈 시간인데.


시계를 보니 아이를 데리러 갈 때까지 약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한데? 얼른 영풍문고 신간 코너로 뛰어갔다. 전시된 책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다가 책 띠지에 적힌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며 웃게 된다"는 문장에 시선이 확 꽂혔다. 제목을 확인해보니 '보건교사 안은영'이었다. 이거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도 나온 거 같던데?


그래, 이거야. 평소에는 돈 아까워서 소설책 따위를 중고도 아니고 (10% 할인되는) 온라인도 아닌 대형서점에서 사는 일은 거의 없지만, 오늘은 이게 필요해. 시류를 알려주고,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자기를 어떻게 계발할 수 있는지 설파하는 책 말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얼른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소파 위에 길게 드러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빨리 사느라 무슨 장르인지 확인도 안 했는데 판타지였네. 판타지 별로 안 좋아하지만 하는 수 없지.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까지 쉴 새 없이 읽었다. 너무 재밌네. 판타지도 볼만하구나. 아니 오히려 판타지라서 현실의 시름을 다 잊게 하는 걸까?


그러면서 어느 틈에 나의 슬픔이 위로받고 있음을 느꼈다. 딱히 작가로부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선한 싸움을 하는 보건교사의 삶'을 통해서 팍팍한 인생을 사는 우리들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전달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재미있어서 즐거웠고, 즐거우니 치유되었다.


갑자기 예전에 꽃시장에 갔던 기억이 났다(아티스트 데이트). 꽃이 예쁘기 때문에 가치 있는 줄도 모르고, 예쁘지만 무가치한 것이라고 여겼던 지난날들이. 재미도 마찬가지구나. 인생이 어차피 기쁨과 슬픔의 합이라면, 슬픔은 우리 힘으로 어쩌지 못한다 해도, 이런 잔재미들로 기쁨의 총량을 늘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구나.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처음, 주저했었다. '나를 위한 글쓰기를 하면서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달라고 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신발창 밑에 들러붙은 껌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야. 그냥 재미 그 자체를 추구해도 되는 것이었어. 내가 제일 많이 읽는 게 추리소설인데, 그걸 읽고 난 다음 무릎을 치며 "역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건가!"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재밌어서 읽는 것 뿐이지. 


명징한 메시지가 없어도, 내가 쓰면서 즐겁고, 읽는 누군가가 즐거우면 그뿐이구나. 대단한 의미 같은 것, 없어도 되는구나. 자꾸만 뭔가를 주려고 하다 보니 점점 무거워지고 부담스러워지고 있었구나. 


어차피 대한민국 사십 대 워킹맘의 삶이란 가만히 있어도 자꾸만 뭔가를 떠맡게 되기 마련인데, 즐겁자고 하는 글쓰기마저 그러지 말자. 여기에서만큼은 한껏 자유로워지자.






https://brunch.co.kr/brunchbook/mychoi-2 


https://brunch.co.kr/brunchbook/mychoi-1


이전 10화 먹고사는 일의 위대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