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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pr 26. 2021

고준희 단발


젖은 머리카락을 흰 타월로 감싸고 욕조를 나왔다. 욕실 문을 열자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희뿌연 수증기들이 거실로 흩어지면서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화장대 앞에 놓인 스툴에 앉아 큰 거울을 마주 보았다. 산타 마리아노벨라 로즈 워터의 반투명한 유리병을 집어 들고 잠시 손바닥 위로 묵직한 무게감을 느낀 다음 스프레이를 얼굴에 칙칙칙~ 세 번 뿌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기분 좋은 차가움이 느껴지면서 장미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손바닥으로 얼굴 구석구석까지 쓱쓱 밀고 찹찹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파란 병 속에 담긴 히알루론산 에센스를 스포이드로 쭉 뽑아 올린 다음 왼손 둘째, 셋째, 넷째 손가락 위에 살짝 짜냈다. 묽은 콧물 같은 점성의 그것을 오른손가락으로 마주 비빈 다음 역시 얼굴 구석구석 잘 스며들도록 펴 발랐다. 그다음 펌프식 용기를 눌러 로션을 바르고, 튜브식 용기에서 보습크림을 짜내어 얼굴 여기저기에 점을 찍듯 묻힌 다음 톡톡 두드리며 펴 발랐다.


타월을 벗자 귀 밑 삼 센티미터의 단발이 거울 속에 비쳤다. 오랜만이라 조금 낯설었다. 코로나로 바깥나들이를 못한 일 년 동안 목선이 드러나던 단발머리가 어깨까지 찰랑이는 긴 머리로 자랐다가 얼마 전에 큰 맘먹고 미용실에 가서 짧게 자른 참이었다.


photo by guilherme-petri on unsplash


"오랜만에 오셨네요. 머리가 많이 자랐어요. 오늘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나는 수줍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네이버에서 '고준희 단발'로 검색해서 나온 것 중 제일 예쁜 사진이었다.


몇 년 전부터 숱한 여자들에게 단발병을 전염시킨 준희 언니(예쁘면 다 언니 ㅋ), 대표작이 '단발머리'라는 그 언니의 머리를 오래전부터 따라 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준희는 숱이 많아서 이런 머리가 어울리겠지. 나처럼 부스스한 반곱슬에 이마숱이 빈약한 사람은 안 되겠지. 이런 머리는 매일 드라이해야 되겠지. 어쩌면 고데기일지도 모르는데 나 같은 똥손은 안 되겠지.


계속 부러워하면서도 잘못 시도했다가 최양락이 될까 봐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코로나로 일 년을 집에 갇혀서 조선시대 노비마냥 정돈되지 않은 채 5대 5로 갈라지는 헤어라인에 뒤로 질끈 묶은 생머리를 하고 다녔더니만 더 무서울 것이 없더라. 뭘 시도하든 지금보다는 나아. 이 참에 도전해보자.


사진을 내밀면서

"저 이거... 될까요?"

라고 묻자 디자이너 선생님은 잠시 동안 뭔가 잘못 먹은 사람처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푸하하, 손님 머리에 이게 가당키나 해요?"라고 실소를 터트리지 않을까 살짝 긴장해있었는데 선생님이 말했다. "한 번 해 볼게요."


가운을 입고 미용실 의자에 앉았는데 기대감으로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선생님의 가위손 같이 현란한 커트가 끝나고, 커다란 헤어롤로 머리를 말았다가 열을 쬐었다가 중화를 했다가 하는 과정을 거쳐 약 한 시간 반 만에 미용실 샴푸의자에 누웠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로 미끄러지면서 두피를 꾹꾹 눌러대는 마사지가 시원했다.


드라이와 추가 컷까지 마치고 나서 거울을 보니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래, 이거야. 내가 원했던 거. 네이버에서 찾은 고준희 단발 사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얼굴이려나.


디자이너 선생님도 흡족한 듯이 말했다.

"생각보다 잘 나왔네요. 손님은 드라이 잘 못하시니까 롤빗 같은 건 쓰지 마시고, 그냥 마구 헝클어서 풍성하게 말려준 다음 손 빗질 몇 번 해주세요."


역시 괜히 15년 단골 하는 게 아니지. 어쩜 말 안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착착 구현해주신단 말이야. 내 똥손을 배려해서 관리하기 쉽게 세팅해주시고. 선생님, 만수무강하세요. 어디 이민 같은 거 가시면 안 돼요.


선생님의 당부를 기억하며 드라이기를 꺼내어 위이이이잉~ 머리 아래에서 위를 향해 세찬 바람을 내뿜었다. 볼륨 업을 위해 마구마구 헝클어주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온 몸을 뒤흔들고 있다. 화장실 가던 남편이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머리를 말리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럴 거면 음악이라도 틀어주지 그래.


다 말리고 나서 거울을 보니 어라? 고준희가 아니라 웬 버섯이 하나 있네. 뭐 아직 손 빗질을 하지 않았잖아. 손바닥에 헤어 에센스를 덜어 파리처럼 싹싹 비빈 다음 머리카락에 바르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며 손 빗질을 몇 번 하니 얼추 비슷한 모양으로 돌아왔다. 휴우, 깜짝 놀랐네.


한동안은 단발머리로 기분 좋게 있을 수 있겠어. 살짝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고르기 위해 옷장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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