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Mar 16. 2021

먹고사는 일의 위대함

배우 윤여정 님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셨단다.


기사를 본 순간 마치 내 일처럼 뛸 듯이 기쁘면서 갑자기 십여 년 전 극장에서 '여배우들'이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났다.


극 중 여배우들이 한류 붐을 하면서 너도 나도 미국 시장, 중국 시장 등의 진출을 얘기할 때 윤여정 님이 담담한 목소리로 "난 재래시장이나..."라고 말씀하셨고, 극장 안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나도 같이 웃으며 사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이미 나이 든 여배우에 속했던 그에게는 재래시장 이상의 가능성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거기 있는 배우들 중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윤여정 님이다(김민희 씨는 뭐...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늦은 나이에 갑자기 배우로서의 영감이 폭발한 계기가 있으셨는지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꾸준함이 아닐까 싶다. 그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무릎팍도사'에 나오셨던 일화도 매우 인상 깊게 기억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특히 '바람난 가족'같이 중견 여배우로서는 파격적인 노출신을 감행하는 영화까지 소화하냐는 질문에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먹고살려고 최선을 다했다


조영남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배우 활동을 그만두었고, 조영남이 바람피워 결국 이혼하면서 재산분할이나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귀국한 그녀가 먹고살면서 자식 키우려고 다시 할 수 있는 일이 연기였다고.


그마저도 처음에는 조영남이 '윤여정의 결벽증이 너무 심해서 같이 살 수 없었다'고 먼저 언론 플레이를 해대는 바람에 비호감으로 찍혀서 불러주는 곳도 없이 손 빨고 있다가, 아는 작가님이 겨우겨우 '전원일기' 조연으로 꽂아 주셔서 들어갔는데, 처음 촬영하는 날 밥 먹는 장면에서 "너는 무슨 밥을 그렇게 먹니?"하고 다른 배우에게 핀잔을 듣고 눈물이 나더란다. 그래서 그때부터 먹고살려고 열심히 연기 연습을 했다고.


'바람난 가족'을 어떻게 촬영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갑자기 살짝 목소리 톤이 높아지면서

"아니, 우리나라 공사업자들은 왜 그래요? 집을 짓는데 분명히 처음에 계약한 것보다 일억 원이 더 나오는 거야. 돈이 어딨어. 할 수 없이 찍었지."

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 신선했다. 다들 먹고살려고, 인기 끌려고 하는 일도 뭔가 묵직한 철학이 있는 것처럼 포장해서 마케팅하던 시대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때부터 윤여정 님의 팬이 되었다.


역사에 남을 대배우가 되겠다, 한류 붐을 일으켜서 할리우드에 진출하겠다, 이런 대단한 포부 없이 그냥 먹고살기 위해 재래시장에도 감사하면서 꾸준히 내게 주어진 일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제 글에 쓴 것처럼 '가벼운 풋워크'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브런치북이 뭐길래)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을 쓸 때 자신의 기복과 관계없이 매일 같은 시간에 원고지 20매 정도를 쓴다고 한다. 더 쓸 수 있는 날도 절제하고, 아무래도 안 되는 날도 포기하지 않는단다. 몇 년에 걸쳐 쓰는 대규모 장편소설도 그렇게 가볍지만 진지한 하루하루가 모여서 되는 게지.


그러니 먹고살기 바빠서 멋진 비전을 가질 틈이 없다고, 있어도 거기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실망하지 말자.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충실히, 꾸준히 하다 보면 결국 그것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갈 거야. 아시아의 한 노배우가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할리우드 레드카펫 위에 서 있게 된 것처럼.


윤여정 님의 수상을 빈다. 그리고 지금처럼 오래도록 건승하시기를!


출처 : 판시네마






https://brunch.co.kr/brunchbook/mychoi-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