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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을 가꾸는 건축가 Jun 22. 2021

연천리, 군대 막사

군대 막사     

E에게 있어 군대라는 공간은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뇌리에 깊이 박힌 곳이다. 군대 입영통지서를 받고 머리를 깎고 1월의 어느 겨울 아침 의정부로 향했다. 의정부 306 보충대를 거쳐 파주에 위치한 어느 사단의 훈련소에서 2개월의 기초훈련을 받았다.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같이 훈련받던 네댓 명의 동기 병사들은 트럭 뒤에 탔고, 뒤 짐칸에 병사를 태운 트럭은 북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리던 트럭은 마치 비밀기지처럼 북쪽에서 공격을 하여도 방어하기 쉬운 가파른 높은 산자락의 남사면에 위치한 연병장에 내려주었다. 3월의 산자락 계곡의 찬바람과 어디인지 모르는 어리둥절함이 가득했던 그곳에서 거의 2년을 살았다. 짧지만 강력한 기억이 담긴 그곳이다. 부대에 배치받고, 처음 휴가를 나갈 때가 되어서야 그곳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산자락의 군대 막사

군부대의 전체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여 지도로 그릴 수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군비밀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할 수 없다. 단지 군대 막사는 어디나 똑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려본다. 막사는 산자락에 있었다. 부대 정문을 지나 국제규격의 축구장만큼 넓은 연병장을 지나서 산자락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막사가 있었다. 막사 앞쪽은 계곡이 흐르고, 뒤쪽은 높다란 산의 경사면이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막사의 형태는 기다란 막대 형태였다. 지붕은 녹색의 아스팔트 슁글이 덮인 박공지붕이었고, 외벽은 붉은 벽돌로 된 단순한 형태의 건축물이었다. 막사의 가운데는 행정실과 간부실 그리고 화장실이 위치하여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각 40명씩 잘 수 있는 침상형 공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개별 침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20명씩 연결된 한쪽 침상에서 나란히 누워 잘 수 있는 그런 형태였다. 최근의 군대 막사는 개별 침상형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고, 그 당시 상급부대는 그런 형태였으나, 내가 있던 부대는 산골짜기 말단부대로 그리 환경이 좋지 않았다. 가운데는 테라조(도기다시) 마감의 통로가 있고, 이 통로보다 약 50cm 정도 높은 침상 바닥이 양쪽에 있다. 이 침상 바닥은 온돌에 노란 장판이 깔려 있었다. 침상 뒤쪽으로는 ‘관물대’라고 불리는 개인물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은 매우 작다. 군대라는 곳에 개인의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 그 관물대에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물품이 군대에서 나의 모든 재산이었다. 4계절용 전투복 상하의 와 겨울에 입는 상의 외투, 깔깔이라고 부르는 방한내피,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가 전부이다. 그 외 철모, 수통, 탄피대 등 전쟁 물품이 있다. 군부대는 1년에도 몇 번씩 출동 연습을 하는데, 단 몇 분만에 자신의 모든 물품을 입고 쓰고, 장착하고 나머지는 큰 개인용 더블백에 담아서 부대를 떠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물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하는 등의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밤 10시 잠을 자는 점호 시간이 되면 한쪽 침상에 10명씩 40명의 매트리스가 노란 비닐장판 위에 열병식을 하듯 바짝 붙여서 펼쳐진다. 한 사람당 얇고 접을 수 있는 매트리스가 주어지는데, 그 폭이 60cm 정도 될까. 한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 크기였다. 그 위에 아주 얇은 천 같은 이불을 하나 더 덮고, 배게를 가운데 통로 쪽에 배치한다. 돌돌 말린 침낭을 펴서 매트리스 위에 깔고 그 위에 앉아서 점호를 받고, 점호가 끝나면 침낭 속에 들어가 바로 취침에 들어간다. 자는 방향도 정해져 있다. 통로 쪽에 머리를 꼭 두고 자야 한다는 규칙이다. 밤에 자는 도중에 꼭 한 번씩은 깨어나 보초를 서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보초근무를 나갈 대기자를 깨워야 하는데, 통로 쪽에 머리를 두고 자지 않으면 사람을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자는 동안에 불침번이 하는 필수적인 일이 있다. 중간 통로 바닥에 물을 뿌리는 일이다. 40명이 자는 공간은 매우 건조했다. 지금처럼 가습기가 있지도 않았고, 그럴 돈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새 1시간에 한 번씩 거의 한 바가지씩 바닥에 물을 뿌려서 자연 가습기를 만들곤 했다.         

부대에는 주요 건물이 2개 있는데, 자는 곳과 먹는 곳이다. 취사실과 식당이 붙은 건물이 별도로 있었다. 식당도 너무나 단순한 건물이었다. 콘크리트 블록으로 벽을 만들고, 지붕은 목재 트러스로 하여 박공지붕을 하였다. 마치 창고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식사 때마다 장작으로 요리를 하였기 때문에 시골집에 온 것 같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겨운 상상을 하기도 했다.

거의 2년을 같은 장소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집이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본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진 장소와 나의 잠자리,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떠날 그곳에서 집을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었을까. 하나의 공간에 40명이 누워서 잠을 자고 휴식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매우 밀집된 수용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의 고시원보다 훨씬 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개인생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옆 사람의 숨소리 조차 너무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공간이었다. 이런 것을 가족보다 끈끈한 전우애라고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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