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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을 가꾸는 건축가 Jun 24. 2021

역삼동, 투룸

강남으로 이사를 가다.     

이번에 소개할 집은 G가 역삼동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살았던 투룸이다.

2000년 초반 졸업하고 직장을 얻으면서 대학교 앞을 떠났다. 대학교 내내 줄곧 학교 앞에서 살다가 드디어 그곳을 떠나게 되는 시점이 왔다. 대학교 때는 과네 동아리 모임에서 운영하던 숙소이자 작업실에서 살기도 했고, 친구와 같이 살기도 했다. 때론 친구 자취방에서 기생하기도 했고, 친구 하숙집 방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아무 계산 없이 하숙집에 놀러 온 나에게도 밥을 주기도 했다. 4년의 학교 앞에서의 전전하던 생활을 접고, 직장과 함께 졸업하면서 강남으로 이하를 하게 되었다.

G가 다닌 대학교는 강북에서도 동쪽 구석인 청량리에 있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어딘가 외진 시골에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가 취직을 하면서 회사가 있는 ‘강남’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운이 좋게도 4학년 때 같이 살던 대학교 친구도 강남 어딘가에 취직되어 집을 같이 쓰기로 하면서, 회사 근처 역삼동에 집을 얻었다. 역시 강남은 강남이었다. 임대료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고, 우선 길에서 외제차를 보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초기에는 도로의 외제차 구경하는 재미로 눈이 호강하기도 했다. 또한 회사에서 사 먹는 밥값도 학교 앞 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취직하고 강남의 물가를 인정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회사 초년생 때 돈을 벌긴 하지만, 직장의 월급이 많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입과 지출에 대한 돈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와 둘이 투룸을 구하다.     

친구 덕분에 혼자 원룸을 임대해서 쓰기에는 부담이 되어 어려웠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마 같이 쓸 룸메이트를 구하지 못했다면, 강남에서 집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룸메이트를 못 구했다면, 회사 입사 동기 중에서 룸메이트를 찾으려고 애를 썼을 것이고, 그것도 안되었다면 대안으로 2호선 라인을 따라서 임대료가 저렴한 2호선 봉천역, 서울대입구가 위치한 서쪽 봉천동 쪽으로 가거나, 7호선 라인을 따라서 동북쪽 건대입구역이나 면목역, 중화역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것이다.

무리가 되면서도 회사 근처에 집을 얻으려고 했던 것은 G의 직업상 밤샘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선배들의 조언으로는 회사에 너무 가까워도 안되나, 출퇴근 시간이 길면 피곤해서 회사 다니기 어렵다고 했었다. 회사에 너무 가까우면 회사에서 일이 있을 때 밤낮으로 불러들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늦게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늦은 시간에도 집에 와서 자고 아침에도 늦잠을 자고서도 회사에 늦지 않게 출근할 수 있는 위치의 집을 찾았다. 어떤 날은 회사 출근시간이 8시 30분인데, 8시 15분에 일어나서 15분 만에 출근한 적도 있었다. 금방 씻고 옷 입고 자전거를 타고 회사로 가곤 했었다. 걸어서 가면 약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으나, 자전거를 타면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임대로 쓸 집을 얻으려고 돌아다니다 보니, 제대로 된 집을 얻기는 힘들었다. 학교 앞과는 임대료의 차이가 상당히 컸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저렴한 것을 찾다 보니 조금 오래된 집으로 어딘가 부족한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강남은 오래된 큰 주택을 철거하고 4층 원룸주택을 건설하는 것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층 상가, 2~3층 원룸, 4층에는 주인이 사는 층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건물 한 채가 그때 가격으로도 30억 정도는 했으니, 범접하기 어려운 상당한 부가 축적되어 있는 동네였다. 오래된 집을 찾다 보니 신축 원룸에는 들어갈 수가 없고, 80년대 건설했던 오래된 주택이거나, 10~20년 전에 4층으로 신축했던 조금 오래된 원룸 건축물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20년은 넘은 4층 원룸 건축물의 투룸 주택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주택의 구성은 거실 겸 부엌이 아주 조금 있고, 화장실 1개, 그리고 각자의 방이었다. 거실 겸 부엌이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거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정도였다. 싱크대가 거의 차지하고 나머지 공간은 현관에서 방과 욕실로 들어가는 복도 역할을 하는 부분이었다. 거실과 부엌이라고 하기보다는 복도에 싱크대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방은 책상과 침대를 놓으면 빈자리가 없었다.      


집이었을까     

이사를 할 때 딱히 짐이랄 것도 없었다. 자취하던 방에서 쓰던 책상과 책 조금, 그리고 이사하면서 어디선가 구한 1인용 침대, 이것이 전부였다. 책상은 작업실에서 쓰던 제도판과 앵글로 만든 책장을 가져왔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책상과 침대, 작은 TV 정도였다. 이사를 마치고 가스 레이지, 냉장고 그리고 세탁기를 중고로 마련했다. 역삼동에는 원룸이 많아서 그런지 중고가전은 생각보다 저렴하고 양호한 것을 구할 수 있었다. 몇만 원 하지 않았으니, 거의 배달하고 설치비 용빼면 공짜다 싶을 정도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3층이었으니, 배달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중고가전의 가격이 역삼동의 생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원룸과 투룸이 몰려있고, 20~30대 계층이 집중된 이곳에서 중고 가전의 순환은 생각보다 빠르고, 멀쩡한 물건들이 중고로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패스트푸드’처럼 ‘패스트 가전, 가구’였다. 공유 가구 가전처럼 누군가 1년 정도 쓰고 바로 다음 사람에게 넘어가는 구조였다.

취직해서 결혼할 때까지 약 5년 정도 역삼동에서 살았다. 5년 동안 1번 이사를 했는데, 바로 근처였고, 거의 비슷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실 겸 부엌, 방 2개, 화장실 1개였다. 월급 받아서 저축한 만큼 다시 집에 임대자금으로 투입하였으나, 집값은 항상 그보다 앞서서 오르고 있으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바쁜 회사생활에 집에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집에 대한 애착도 없었고,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도 없었다. 밤에 와서 잠을 자는 정도, 집에서 딱히 무엇을 해 먹을 것도 없었다. 좁은 방에서 잠을 자거나, 책상에서 책을 보는 정도였다.

이곳은 집이었을까. 직장 앞의 원룸을 나의 집이라고 인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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