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아파트에 살아보다
H는 결혼을 하고 신혼집은 아파트로 시작했다. 아파트는 처음 살아보는 곳이었다. 태어나서 계속 주택에 살다가 결혼 후부터 아파트에 살아보니, 아파트의 삶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사실 어릴 적에 단독에 살면서 내가 직접 집을 관리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불편이 있는지 눈으로 보고 살았기 때문에, 아파트의 편안함은 신세계였다. 단독주택의 불편함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이 편리함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의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관리비를 지불해야 편리함을 가질 수 있다. 도시의 일정 면적을 일정 수의 사람이 점유하면서 그들의 돈을 모아 아파트 내, 외부를 스스로 관리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매달 납부하는 관리비로 유지되는 아파트의 편리함을 한번 경험하면 다시 빠져나가기 어렵다.
결혼하고 처음 살았던 동네는 관악구 봉천동의 산자락에 위치한 K아파트였고, 이후에도 아파트 임대 난민의 행진은 계속 진행 중이다. 높은 임대가의 상승 속에서 오래된 아파트를 찾아 임대가를 감당하거나, 외곽으로 이동하며 작은 벌이로 감당할 수 있는 낮은 임대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파트를 기록하다
단독주택을 기록하는 것과 아파트를 기록하는 것은 삶의 영역을 인식하는 차이로 인해서 기록의 범위에 차이를 가진다. 단독주택은 도시에 하나의 점으로 내가 살았던 곳을 기억하지만, 아파트는 도시에서 일부인 아파트 단지를 크게 인지하고, 그다음에 내가 살았던 세대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인지의 과정에 한 단계의 과정이 더 있다. 또한 아파트 단지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유지이면서 공유의 장소라는 점에서 도시의 한 점인 단독주택과는 인지에 차이가 있다. 단독주택도 동네, 마을이라는 공유의 영역이 있지만, 그 영역의 크기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느끼는 동네, 마을의 영역은 아파트 단지의 경계선으로 아주 분명하다.
잠실 진주 아파트 단지는 잠실 아파트 대단지의 동쪽 끝자락이다. 1975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잠실 1 ~ 5단지 이후에 잠실나루 역(옛 성내역) 주변에 서울시에서 건설한 잠실시영 아파트 단지를 시작으로 일반 건설사에 의해서 진주, 미성, 장미(1,2,3차), 크로바 아파트 단지가 주변에 건설되었다. 이 근방의 많은 아파트 단지는 '라이프주택'이 건설하였는데, 잠실 장미, 진주, 미성 모두 라이프주택이고, 여의도에 있는 동명의 아파트인 진주 등도 라이프주택의 건설 실적이다.
잠실 진주아파트
잠실 진주아파트 단지는 19동 1,507세대, 연면적 약 66,000평, 지상 10층, 100% 지상주차장이다. 평형은 전용 59, 71, 81, 118, 128, 148 ㎡로 되어 있다. 다른 단지에 비해 대형 평형의 비율이 높다.
H는 2014년부터 약 2년 동안 진주아파트에 거주하였다. 이곳은 잠실나루 역을 중심으로 이루는 아파트 단지의 일부로 잠실 생활권을 누리는 생활편의시설과 올림픽공원이 근접하여 상권, 교통, 공원등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좋은 아파트 단지 중에 하나이다. 특히 단지 내 벚나무가 많아 아파트 단지 내의 축제로 ‘진주아파트 벚꽃축제’가 매년 개최되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아파트 단지의 마을 영역의 시작은 문주이다. 지금도 아파트 단지의 문 주는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과 같이 당시에도 문주에 상당히 신경을 쓴 디자인이다. 건설사인 라이프주택의 입간판이 문주의 한 곳을 차지하고 있다. 원래는 붉은 타일인데, 추후에 베이지색 페인트가 칠해서 있는 상태이다. 입구의 다른 쪽 반대편에는 "진주 타운"이라고 아파트 명칭이 쓰여 있다. 아파트 문주를 지나면 나의 마을 영역에 들어온 것이고, 그다음 단계는 동출 입구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의 주동 출입구에 다다른다. 복도식 아파트의 동출입구로 100세대가 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입구 상단의 아치형과 양쪽으로 펼쳐진 계단 벽의 조형이 인상적이다. 1980년에 건설된 아파트라서 동출입구에 계단은 상당히 넓고 높은데, 장애인 램프는 없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건비 문제로 경비실이 사라지는 추세인데, 동출입구마다 경비실이 배치되어 있었고, H가 살았던 당시에도 경비실은 유지되고 있었다.
동출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지나면 이제 나의 집이다. 현관을 열고 들어오면 바닥 타일이 붉은색 타일이 먼저 보인다. 문주의 타일이 붉은 칼라인 것과 같다. 현관문은 철문이긴 하였으나, 처음 시공된 철문 상태인지, 전혀 밀실 하지 않고, 삐걱거리기 일수였다. 겨울이면 찬바람과 도로의 소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문풍지 등으로 틈새를 메우지 않고는 살기 어려운 상태였다. 최근의 현관문이 방화 기능과 단열기능 등을 겸비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완전하게 철판으로만 이루어진 철문이었다.
H가 살았던 집은 침실 3개, 거실, 주방, 욕실 1개로 구성된 전면 2 베이 집이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주방과 식당이 있고, 그 안쪽에 다용도실과 가장 작은 방이 있다. 왼편으로는 두 번째 큰 방이 있고, 그 방에는 붙박이 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오면 거실이 복도를 지나 보이고, 거실 창을 통해서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였다. 내가 살았던 집은 거실의 발코니가 확장되어 있었는데, 난방관을 연결하지 않아 겨울에는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
중간에 위치한 욕실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욕실 문 상단에 아래 사진과 같이 어린아이가 오줌 누는 조형이 아직 남아 있다. 욕실 문 하단에는 통풍구멍이 뚫려 있다. 욕실의 자연 배기에 대응하는 급기를 위해서 만든 구멍일 것이다. 간혹 구멍으로 화장실 내부의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세심한 디테일 일수도 있고, ‘실수’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당시 라이프주택은 주택 내부에 목공 및 가구 제작을 직접 하는 회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그것에서 오는 새새한 신경 씀이 아니었나 싶다. 욕실 바닥은 파란색 타일로 되어 있고, 욕실 내부에 라디에이터가 있다. 칼라 감각이 독특하다. 빨간 타일, 파란 타일 등이 단지 내 여러 곳에 쓰이고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H가 살았던 집은 1980년 입주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던 집이 아니었나 싶다. 수리가 거의 되지 않은 채 오래되어 살기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80년대로 시간여행을 갔었던 같은 기억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