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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pr 24. 2024

이모를 보내 버려

그날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가운데 하루였다.


물론 그녀는 티브이를 보다 가도, 심지어 동화책을 읽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잘 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자신의 사랑스러운 조카들 앞에서 처음 울던 날이 있었다. 그날은 퇴사를 결심하던 어느 날이었다.


"자꾸 나를 몰아치니까, 정말 도저히 힘들어서, 더는 못 다니겠어...."

어설프게 쌓아 올린 인간관계의 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동생에게 퇴사 결심을 말하던 날, 이모의 터져 버린 눈물샘을 보고 어린 조카들(당시 세 살쯤으로 추정)이 이모 곁으로 다가온다. 이모 눈가에서 흘러나오는 구정물 같은 괴로움의 딱지들을 손수 닦아 준다. 이모는 자꾸 닦아 주니 더 더 운다. 그렇게 울다 보니 그래도 눈물샘이 마른다. 이날이 바로 그녀가, 즉 이모가 조카들 앞에서 처음 울던 날이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세 살이던 조카들은 일곱 살, 여덟 살이 넘어간다. 질질 짜던 그 이모는 '짜는 대신 터트려 버리는' 거친 성격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는 왜 화를 한 번 도 안 내?"

화장실에 쉬를 하러 들어가려다 말고 이모 앞으로 와서 둘째 조카가 웃으며 묻는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다. 왜 안 내, 화를?


"우리 엄마는 우리가 뭘 잘못하면 화내는데... 근데 이모는 왜 큰 소리를 안 내?"

이모는 말이야, 로 시작하는 '라떼는 말이야' 타임이 왔다. 이모는 구구절절 자신의 높은 성품을 조카에게 설명해 다. 말을 '더럽게도' 안 듣고 장난도 정도 이상으로 심하게 치는 청소년 형아, 누나 들과 오랜 시간 함께한 적이 있어서, 너희들의 장난은 내게 장난 축에도 안 낀다, 그래서 화를 낼 '건덕지(건더기)'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아무리 날 화나게 해도 '나 같은 성인군자'는 화를 내고 싶어도 못 낸다, 라며 스스로 나의 성품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자화자찬 며칠 후...



엄마는 자주 화내니까 인정해 줄게.

그런데 이모는 한 번도 화를 안 내다가 갑자기 화를 냈어.

엄마는 으~~~ 하고 화냈는데

이모는 아악~~~ 했어.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면 무섭잖아.

근데 이모가 갑자기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화를 냈다고.

이모를 용암에 빠트리고 싶을 만큼 화났다고, 이모한테 나의 복수를 써 줘.


엄마, 이모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갑자기 화를 낸 거야.

이모를 남극이나 명왕성으로 보내고 싶어.


졸지에 이모는 남극행 혹은 명왕성행이 확정되어 버렸다.(경축)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 조카들이 이모 방 베란다 구석에서 1차 싸움을 펼친다.(조카1: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 '환상 속의 그대'를 듣겠다 ↔ 조카2: 나는 그 노래 안 좋아한다, 기타를 치겠다. 꺼라. 시끄럽다. ↔조카1: 아니다, 네가 더 시끄럽다.)
2. 둘은 베란다에 있던 레코드 기계가 휘청할 정도로 몸을 부딪치며 서로를 구석으로 내몬다.
3. 이모가 말린다. 중간 크기의 소리를 지른다. 씨알도 안 먹힌다.
4. 조카 둘은 계속 싸운다.
5. 소강상태 후 두 녀석은 다시 자리를 옮긴다.
6. 이번엔 한 녀석이 안방, 다른 한 녀석이 거실이다. 서로 '출입금지'를 명한다.
7. 한 녀석이 출입금지를 깨고 다른 녀석의 구역에 들어온다.
8. 두 사람은 모두 화가 난다. 왜 내가 출입금지야? 넌 왜 내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왔어?
9. 한 녀석은 달력을 들고 있던 손으로, 다른 한 녀석은 '출입금지' 글자를 쓰다 만, 연필 든 손으로 싸움을 시작한다.
10. 2차 싸움이다. 1차보다 격렬하다. 한 녀석이 다른 한 녀석을 침대로 밀친다.
11. 자기가 연필을 쥐고 있는지도 모르고 몸싸움 중이다.
12. 이모가 뜯어말린다.
13. 역시 또 말을 안 듣는다.
14. 이모가 빽! "지금 너희 뭐 하는 거얏!!!!!!!!!!" 아주 괴성을 지른다.
15. 싸움이 멎는다.
16. 싸움은 끝났는데 당황스러움이 시작된다.
17. 저 사람, 우리 이모 맞아?
18. 연필 들고 뭐 하는 거야! 이모가 둘을 나무란다.
19. 한 녀석의 어깨가 훌쩍거린다.
20. 다른 한 녀석은 이모 방으로 달아난다.
21. '이모가 큰 소리를 내서 미안하긴 한데 그렇게 연필 들고 몸싸움을 하면 안 되지!'라고 말한다.
22. 한 녀석은 이모한테  '저리 가'라고만 한다.
23. 다른 한 녀석은 이모 방으로 갔다가 뒤따라온 할머니 품에 꼭 안긴다.
24. 한 녀석은 안방에서, 다른 한 녀석은 이모 방에서 서러워 운다. 두 눈이 빨갛다.
25. 조카들이 처음 울던 날이다.



이모 때문에 조카들이 처음 울던 날이자, 이모가 태어나 처음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조카들을 울린 날'이다. '이모보다 더 바보야.'라며 다른 사람의 바보짓을 이모에 빗대 나무랄 정도로, 조카들에게 이모는 '바보' 수준이고 딱 '장난감' 수준의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생전 자신들한테 화도 안 내던 그 양반이, 거칠 것 없이 소리를 지른다.


조카들은 분하다. 억울하다. 일부러 연필을 들고 싸운 게 아니다. 싸우다 보니 내 손에 연필이 들려 있었던 거다. 이모는 그걸 모르고 우리를 오해하고 화까지 낸다.



"혀니야. 이모가 큰 소리를 내서 미안해. 근데 너도 달력에 연필 꽂아 둔 채로 싸우긴 했잖아."

"호니야. 이모가 큰 소리 내서 미안해. 근데 너 싸울 때 연필 들고 있었잖아. 네가 전에 그랬지? 이모 왜 한 번도 화를 안 내냐고. 이모는 이렇게 위험할 때는 화내. 그래야 해."


이모의 '근데'는 조카들에게 사과도 뭣도 아니고 '혼내는 이야기'의 도돌이표일 뿐이다. 사실 이모도 마음은 안 좋다. 이모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그 당황하던 눈빛들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 마음에 일렁거리던 그 놀라움. 그 놀라움은 분명 예쁘고 밝은 색은 아니다. 우중충하고 어두운 색일 뿐이다.



"이모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서 그랬다는 뻔한 이야기로 사태를 무마해 보려 한다. 그러나 조카들은 쉬이 이모의 반성(?)을 받아 주지 않고, (자기들이 잘못한 것은 물론 1도 생각하지 않고) 이모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사부작거리더니 한 녀석이 갑자기 이모 손을 잡고 이모를 방으로 이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이모 방의 방문을 가리킨다. 거기엔 이모의 명함이 붙어 있고, 명함 위엔 이렇게 쓰여 있다.


<혀니호니방. 이모금지>


이모는 이렇게 조카들에게서 앞으로도 영원히 '금지' 및 '유배' 조치를 당하는 것일까?




'금지'를 엄하게 써 놓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잠들던 (조카들의) 그날 밤.


혀니와 호니는 자기 엄마에게 이모의 만행을 고자질(?)하며 이모를 남극과 명왕성으로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어쩐지 그날 밤따라 이모 귀가 간지러웠다.) 조카들은 이모를 향한 복수를 다짐한다. 함께 '웃기만' 하던 사람이 나를 울렸으니, 복수를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을지도.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면 무섭잖아.

근데 이모가 갑자기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화냈다고.


그렇다. 그날 이모는 조카들 말대로 화산이었다. 용암 배터리가 100%로 충전된 화산이었다. 왜 사람들은 소리를 안 지르면 말을 안 들을까,라는 의구심을 품으며 막판에는 내 사랑 조카들에게까지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후회는 안 한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때는 '큰 소리' 말고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모의 '높은 성품'은 보기 좋게 허물어졌다. 이제 이모는 '화도 안 내는 착한 이모'에서 '쓸데없는 곳에서 뜬금없이 폭발하는 화산 이모'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 이모랑 안 논다고 하게 생겼네."

할머니(이모의 엄마)는 앞으로 허전해질 이모의 옆구리와 더없이 풍족해질 이모의 자유시간을 미리 짐작해 본다. 이제 조카들은, '이모랑 놀아야 한다'는 말을 꺼내는 대신, 이모를 남극 출신 펭귄 친구로 만들어 버릴 속셈만 채우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혹여나 조카들이 영상 통화로,

"이모, 우리 화해하자. 다시 놀자."

라는 말을 건네온다면?


뒤끝 있고 성품 우수한(?) 이 봄먼지 이모는,



"이모 아직 명왕성에서 안 왔어. 여기 살기 좋더라. 좀 더 오래 놀다가 갈게. 지구에서 먼저 놀고 있어."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제대로 화를 내는 여정'에 돌입한 이모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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