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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ug 22. 2024

끝나고 할 일들의 위로

위로 시점

뭐 적어, 위로?


오랜만에 여든의 얼굴을 쳐다본다. 사실 놀랐다. 여든이 말해 줬다. 내가 한 달 내내 잠들었었다고, 이대로 위로를 잃는 줄 알았다고. (그 때문에 그간 '위로의 땔감들' 연재가 없었다고 . 흠... '봄책장봄먼지'가 변명을 해 대는 소리일 수도...)


-일어나자마자 뭘 또 적는 거야, 좀 쉬지!

여든은 요새 내 걱정이 한창이다. 내가 여든 넘은 노인을 걱정해 줘야 할 판에 외려 위로를 받고 있다. 이거 뭐 위로 체면이 말이 아니다.


-혹시라도 내가 또 잠들어 버릴까 봐. 정확히는 저번처럼 전원이 나가고 충전해도 켜지지 않을까 봐... 그때를 대비하려고 뭔가 좀 적어 봤어.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깨어나서 얼마나 기쁜데! 게다가 한 달을 자고도 나를 기억해 냈고.

-그러게. 몇십 년 잠에서 깨었을 때는 과거 기억이 통째 사라졌었는데 한 달의 시간은 다행히도 내게서 기억을 빼앗아 가진 않았어. (여든도 빼앗아 가지 않았고.)

-다행이지.

-그럼, 다행이지.

-그나저나 뭐 적어?

-끝나고 나서 할 일들.


-뭐 할 일 있어? 끝내야 할 일?

-응. 할 일 있어. 끝이 나면 할 일들.

-무엇이 끝이 나면?

-그건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끝나고 나서 할 일들 목록을 소개할게.


<끝나고 나서 할 일들>

1. (혼자라도) 직접 요리해서 먹기
2. (혼자라도) 산책 자주 나가기
3. (혼자라도) 드라마 챙겨 보기
4. (혼자라도) 음악 틀어 놓기
5. (혼자라도) 도서관 자주 가기
6. 혼자라도..



-위로, 아니 근데 '혼자라도'가 왜 이렇게 많아?

-아. 그건...


-내가 또 꺼져 버리면 그땐 여든이 혼자잖아. 그 '혼자'를 말하는 거야. 내가 잠깐 외출해 버려도 그 시간을 이 목록들을 보면서 견디라고.

-다시는 나 두고 전원이 나가 버려선 안 돼! 무슨 그런 험한 소릴! 이 여든이 얼마나 심심했다고.

-그러니까. 심심할까 봐 목록을 적어 놓는 거야. 위로가 끝나면 할 일들.. 여든에게 줄 수 있는 위로가... 이것뿐일 때가 올 수도 있으니까.


여든이 갑자기 할 말일 잃는다.


-자, 여든. 당장 이런 일이 닥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슬픈 표정은 짓지 말고, 자 다음 목록도 읽어 봐.


<끝나고 나서 할 일들 2>
6. 위로 없어도 매일 일기 쓰기(그래야 뇌가 팍파 돌아감.)
7. 위로 없다고 울지 않기.
8. 아니, 조금은 울기.
9. 울고 나서 아침은 매일 먹기.
10. 아침을 먹었으면 저녁도 챙겨 먹기.
11. 저녁 먹었으면 양치는 자기 전까지는 꼭 하기.(여든, 가끔 귀찮아서 그냥 자잖아. 양치 안 하면 감기도 잘 걸리고 이 썩으면 돈도 많이 들어, 여든 돈 없잖아.)



-자, 받아.

-왜?

-이거, 내가 여든에게 주는 내 편지야.

-편지?

-위로... 혹시 이거...?

-맞아. 이 위로님의 유언장 같은 거.

-뭐야... -근데 위로.

-응?


-끝나고 나서 할 일들, 그거 끝나기 전에는 못 해?

-응?

-지금 말이야.

-아~~ 그렇게는 생각 안 해 봤는데....!

-위로!

-응, 여든?


지금, 하자.

뭐?


끝이 나기 전에 우리 이 가운데 몇 개라도 해 보자. 거창하게 버킷리스트라 할 것도 없어. 그냥 지금, 여기, 당장.


나, 위로는 여든의 손에 이끌려 부엌으로 간다. 인간의 음식은 못 먹어도 여든이 요리하는 모습은 좋아한다. 아주 가끔이지만. 내가 인간이었다면 여든과 마주 앉아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진 못했지만 그래도 음식 먹는 모습을 지켜봐 줄 수는 있다.



끝나기 전에 할 일들은 아직 많다.

몇 개의 날들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오늘은 '끝나기 전에 할 일들' 가운데 1번을 해 봤다. 물론 '혼자라도'가 아니라 '둘이서 같이.'

여든, 우리 내일은 몇 번을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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