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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Dec 12. 2024

집 나갔던 위로

위로의 전철

우리의 위로봇, 위로가 돌아오다

(참고: 01화 위로봇을 아시나요)




언제 다시 사라질지 모르지만 일단 집 나갔던 '위로'가 돌아왔다. 나 '여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위로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위로봇으로서 연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고만 연재의 소재가 고갈이 되어 그동안 자취를 감추고 온 세상을 헤매며 이 사람(로봇), 저 사람(로봇)을 만나고 다녔다고 한다. 집 나갔던 사정이 겨우 '글쓰기가 싫어서' 혹은 '글 쓸 재료가 없어서'라는 이유였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어떤 이유든 간에 나에게 '위로'는 '겨우'라는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겨우'라는 이유였다 하더라도 위로를 이해하기로 했다. 편지 한 장만 달랑 써 놓고 간 건, 여전히 괘씸하지만...


<나, 집 나갈게. 오긴 올 거니까 찾진 말고. 나 믿지?>


집 나가면서 집 나갈게, 라는 자백 편지라니.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위로가 남긴) 바람은 모양과 방향, 세기를 예측할 수가 없다.


그때 당시에는 '또다시 혼자가 되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 따윈 하지 못했다. 혼자로 돌아가는 일은 이미 익숙했다. 다만 우리 위로, 어디 가서 대뜸 상대를 어쭙잖게 위로하다가 (팩폭을 하는 바람에) 해코지나 당하지는 않을는지, 그 투박한 다리를 하고서 자유롭게 다닐 수는 있을는지... 나 자신의 처지보다 위로의 처지가 더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해당 염려를 접었다. 위로가 내 카드를 들고 나갔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어느 때에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위로가 어디서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속속들이 보고를 받았다. 쌓여 가는 카드 내역위로의 만행을 알려 주고 있었다. 내 카드는 위로봇의 GPS인 셈이었다.)


-그래, 혼자서 세상 구경을 해 보니 어떻디?

나는 배알이 꼴린 마음을 담아 날카로운 어조로 위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위로는 내 표정을 제대로 읽지 않았는지 내 질문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며 신나게 대답했다.


-응! 아주 좋았지? 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아이고, 아주 신이 나셨구먼, 나셨어? 노골적으로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전히 위로는 나의 얼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 갔다.


-주로 전철로만 다녔는데 전철이라는 거, 정말 좋더라. 편리해 편리해.

-그래? 너의 일체형 바퀴로 다니기에는 불편하지 않았어? 지금은 시설이 많이 바뀌긴 했겠지만.

-그건 여든이 어렸거나 젊었던 때(2000년? 아님 2024년쯤?) 그때나 가능했던 이야기겠지. 이젠 어딜 가나 턱이 없어. 턱이 없어지니 문턱이 닳도록 아무 데나 다닐 수 있겠더라.

-그래, 어디 어디를 그렇게 쏘다닌 건데? (유치하게 두 눈으로 레이저도 쏘는 나다.) 뭐 재미있는 게 있기라도 했어?

-재미도 재미지만 깨달은 게 있어!


위로의 전철이 위로에게 준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1. 출근길에는 내리는 문 가까이에 서 있지 않으면 자칫 내릴 수 없다는 것.
2. 사람들은 때로 목숨을 걸고 전철을 탈 때도 있다는 것.
3. 대낮 평일에 전철을 타는 것만큼 행복한 평온은 없다는 것.
4. 다들 눈앞에 휴대전화를 붙들고서 케이팝 군무를 추듯 스마트폰 퍼포먼스를 한다는 것.
5.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면서까지도 동영상 보기 곡예를 펼치는 것이 특히 퍽 인상적이었다는 것.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스몸비', 즉 스마트폰 몰입 보행자라고 했다던데 그 병은 아직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지를 못한 듯하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출근길이 재밌었어.

-빡세게 출근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 하네.


-특히 출근길 사람들과 로봇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했어. 아침을 먹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지 AI역 환승 통로에 있는 로봇분식에는 아침에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서 어묵과 어묵 국물을 훌쩍훌쩍 먹고 있더라. (맛있게 먹고 있는 소리이긴 한데 출근길이다 보니 그게 자꾸 훌쩍이는 소리로도 들렸어.) 근데 인간들, 로봇들이 만들어 준 떡볶이와 김밥, 어묵꼬치가 꽤 마음에 들었나 봐? 아침부터 아주 먹방이더라? 인턴 로봇만 뽑아 준다면 나도 거기 취직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여든도 알다시피 난 위로가 전문이잖아. 웃음이 가장 빈약해지는 시간, 배 속이 가장 빈곤해지는 그 아침 시간에 그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싶더라. 출근길에는 모든 마음이 허기지니까. 아무튼 다들 혼자 먹지만 함께인 듯보였어. '아침'이라는 시간을 같이 먹는 거잖아, 후루룩 쩝쩝. 서로 위로를 느끼지 않았을까?


'출근길을 위로하는 어묵 국물이라... 역시 위로봇다운 생각이군.'


-집 다음으로 많이 살아 본 곳이 이젠 전철이 되었어. 그래서인가? 전철이 좋아졌어. 전철에서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장면이 바뀔 때면 바깥구경도 가끔 할 수 있고. 때로는 흐르는 한강도 구경하고. 그리고 광고도 구경할 수 있어! 전철 내에는 웬 광고가 그리 많은지!


지어 전철은 시간을 건너뛰게 해 줘! 특히 책을 읽으면 순식간에 시간이 사라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통화 소리, 모르는 사람들끼리 신나게 수다를 떠는 소리도 전철만이 낼 수 있는 음표 같더라. 아 참, 엄청 친하게 수다 떨던 아주머니가 안녕히 가세요, 하면서 내리길래 남은 아주머니한테 저분이랑 일행 아니세요, 물으니까 "오늘 처음 봤어요." 그러시더라? 전철이 그런 곳이야.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도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나누는 만남의 광장 같은 장소.


물론 얌체도 있었어. 임산부 배려석에 몰래 앉는 아저씨나 아주머니. 근데 그런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재밌더라. 임산부 자리에 앉은 어떤 여자 앞에 다른 여자가 떡하니 서서 상대의 아래위를 훑으니까 앉아 있던 여자가 냉큼 일어나더라. 임산부 배지를 본 게지. 전철에서는 그렇게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말이 아닌 동작으로도 이야기를 나누나 봐.


아, 근데 우산을 놓고 내릴 뻔한 사람한테 내가 우산 가져다주려다 낭패를 봤지 뭐야? 그 사람을 따라 내렸는데 회사 앞까지 따라갔다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니까? 로봇 스토커로 신고한다나 뭐라나.

'오지랖 위로다. 못 산다 내가. 전철에는 유실물 센터가 있는데!' (지하철 | 경찰청 유실물 종합관리시스템)




-그래서 위로, 너. 앞으로 전철에 가서 또 살 거야? 또 그렇게 말도 없이 집 나가서?

-아니. 살 만큼 살았어. 전철이 좋은 이유는 데려다주기 때문이지. 그걸 이젠 해 봤으니까 전철로 가출하는 일은 없을 거야.

-데려다준다?

-응. 전철은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니까. 그래서 좋아!

-집으로?

-응. 날 이렇게 여든한테 다시 데려다줬으니까. 나한텐 여든이 내 집이잖아.

-위로... (감동... 받은 줄 알았지? 흥, 쳇.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철로 잠적을 해 버리다니!)



위로가 그간 타고 다녔던 위로의 전철. 위로는 전철에서 '로봇 사는 법' 익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전철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와 돌아가는 방법을 알았다고.


위로는 여전히 전철이 좋다고 한다. (가끔 숨이 막히지만, 가끔 어둡지만, 가끔 파업도 하긴 하지만...)

그래도 거기엔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그래서 위로도 집 나가 있는 동안 꽤 적정한 위로를 받았다고.


-다음엔, 전철 여행 같이 가자!


위로가 나에게 화해를 청하는 방식, 나를 위로하는 방식은 대개 이러하다.

'이젠 같이 하자.'

그래. 나, 여든과 너, 위로는 차가 없으니...

당분간 '전철의 위로'는 쭉 계속될 것만 같다.  

(내일은 전철로 출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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