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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Nov 28. 2024

훼손되어도 좋을 아픔

폄훼, 훼손, 손상, 상처

#1


뭉갰다, 나의 아픔을. 사람을 잃은 친구 앞에서 나의 6~7년간 어두운 터널쯤은 아주 작은 무게였다.


"그냥 두 눈에서 시도 때도 없이 별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더라."

"그랬겠다. 나도 전에 임용 고사 볼 때 눈물..."

"아, 그건 괜찮지. 시험 떨어져서 눈물이 나오는 건 괜찮지."


아, 난 괜찮은 거구나. 지금 타인의 아픔과 절망이 너무 크다. 내가 제때 위로하지 못한 슬픔이다. 그래, 내 지난 시절의 아픔은 훼손되고 폄훼되어도 괜찮아. 사실 시험이 떨어졌다고 울진 않았다. 그래서 울었다고 말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젊은 날, 너무 앞날이 깜깜해서 덜컥 겁이 날 때마다, 무기력해질 때마다 나도 그냥 눈물이 주르륵 이유도 없이 흐르더라고, 단지 그런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이를 통해 눈에서 물이 나오는 행위에 관해 '공감'이란 것을 해 보려 했다. 적절한 비유도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즉각 입을 닫았다. 내 아픔은 가벼웠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고 그래야 했으니까.



#2


"으, 나 허리가 너무 아픈데?"

심상치 않았다. 난방 없는 카페 1층에서 3시간 가까이 수다를 떨다 보니 허리가 너무 아팠다. 김장의 여파도 있었을 테고 의자에 앉아 일하는 시간이 많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경직된 자세로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허리가 아파도 너무 아팠다. 빨리 일어나 걷고 싶었다. 일어나면 조금 나을 듯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다.

"허리가 왜 아파?"

구구절절 이유를 댔지만 이유를 댈 시간에 나는 일어나서 걸었어야 했다. 상대는 자신의 어둠과 아픔을 토로하는 중이었다. 내 신체적 아픔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가끔 삶이 너무 무서워 살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든다는 상대의 표정 앞에서 나의 허리 통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평생 처음 만나는 통증이 허리에서 올라왔다. 끊어질 듯한 아픔이 이런 것인가. 병원을 가 보아야 하나, 이 아픈 허리로 병원은 또 어떻게 가나.

"아팠을 때 바로 이야기했어야지, 친구한테 그런 것도 이야기 못 하나?"

정곡을 찌르는 아버지의 말. "아니거든요!"라고 변명해 보았지만 뒤돌아보니 아니거든요, 가 아니었다. 나는 틀렸다. 나의 아픔 앞에서 나는 늘 틀린 자세를 유지했다. 아픔을 방치하여도 내가 이해할 것이라고 늘 나를 설득해 왔다.


평소 하던 대로 약상자에서 근육통 이완제를 찾아내 입에 털어 넣었다. 조용히, 가만히 나의 허리 통증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누군가의 말대로 폄훼되어도 마땅하다는 듯 나의 손상된 상처를 다시 묶어 버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 서랍 안으로 상처를 처리해 버렸다.



(貶毁): 남을 깎아내려 헐뜯음. 

손(毁損): 「1」 체면이나 명예를 손상함. 「2」 헐거나 깨뜨려 못 쓰게 만듦.

상(損傷): 「1」 물체가 깨지거나 상함.  「2」 병이 들거나 다침.  「3」 품질이 변하여 나빠짐.  「4」 명예나 체면, 가치 따위가 떨어짐.

처(傷處): 「1」 몸을 다쳐서 부상을 입은 자리.  「2」 피해를 입은 흔적.



아 네 가지 어휘 가운데 내가 겪은 아픔들은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사실 '상처'라는 것들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지 오래다. 어떤 폄훼나 훼손, 손상, 상처가 내게 아직 남았다 해도 그것들은 나의 현재와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 말하듯 나의 아픔은 훼손되어 마땅하다. 가벼이 취급해도 괜찮을 것이다.



추신: 그런데 정말 훼손되어도 되나? 훼손되어 마땅한 거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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