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달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당근마켓으로부터 '3월 가계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나는 가계부는커녕 영수증 종이조각도 잘 못 모으는 사람인데 그런 나를 대신해 가계부를 작성해 주었다니, 고마운 마음과 함께 호기심이 일었다.
'판매 3건(11,500원), 구매 13건(81,500원), 나눔 1번'. 이것이 당근 가계부가 말해 주는 지난 3월 나의 중고물품 거래 내역이었다. 가계부가 말해주는 그대로였다. 지난달은 아이들 새 학기라 옷가지며 학용품, 그밖에 소소한 준비물을 챙기느라 평소보다 물건 살 일이 많았다. 그런데 실상 마음이 기울었던 건 얼마나 많은 물건을 사고팔았느냐 하는 점이 아니었다. 더욱 눈여겨보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를 312.1km 덜 탄 것과 같아요', '보일러를 20시간 덜 작동시킨 것과 같아요'와 같은, 개인간 중고 거래가 갖는 의미를 환경적 가치로 환산한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당근 가계부의 분석이 과연 신뢰할 만한 통계치라면 소소한 중고거래가 갖는 가치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경우 한 달간 도합 17번의 중고 거래가 자동차 주행을 무려 312.1km, 보일러 가동을 20시간이나 줄였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탄소발자국을 상당 수준 감소시켰다는 뜻이니까.
이실직고 나는 지구와 환경을 지켜내겠다는 대단한 작심 없이 그저 동네를 소소하게 오가며 재미 삼아 물건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적은 값을 치르고 쓸만한 물건을 들이면 괜히 뿌듯한데다 물건 팔아 만든 돈으로 아이들 간식거리나 찬거리 한두 개쯤 집어오면 살림을 썩 잘한 생각이 들곤 하니까. 중고 거래란 모름지기 살림을 꾸리는 이가 누릴 수 있는 제법 쏠쏠한 재미인 것이다. 거기에 나는 가장 보통의 지구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보탰을 뿐이다. 쓰던 물건이 아직 사용할 만해서, 그냥 버리기 아까우니까, 왠지 필요한 사람이 있을 거 같아서, 물건을 끝까지 사용하는 일이 어쩐지 그 물건과 지구에 예의를 다하는 일인 것만 같아서.
자신의 유익을 위한 작은 생활 실천으로도 이정도로 지구에 유익을 끼친다는데 까짓거 아줌마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변화시키지 못할 일이란 없겠다 싶었다. 어쩌면 소비의 주된 주체, 그중에서도 각 가정의 생활을 책임지는 주부는 환경보호의 최전방에 서 있는 지구지킴이일지 모른다. 중고거래의 활성화야말로 거대한 구호를 외치지 않고도 지구를 위기로부터 구할 한 가지 방법임에 틀림 없다.
이런 나도 한 번씩 통 크게 맘먹고 두 아이에게 새 옷을 사 입힌다. 주로 양가 부모님을 뵐 일이 있을 때다. '애들한테 남이 입던 옷 입히지 말고 새 걸로 사줘라' 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을 영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다. 여전히 새것이 가장 가치 있고 빛난다는 오랜 인식을 깨기에 역부족이라 느낄 때면 한박자 쉬어 간다. 고집스런 다이어터가 어느 날은 식욕의 잠금장치를 풀고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하듯, 오래 억눌러온 소비의 욕구를 풀겸 '치팅데이'를 맞는다. 당근홀릭자가 누리는 일종의 보상의 날이요, 그만의 이벤트쯤 될 것이다.
3월의 당근 가계부, 아니 환경보호 성적표를 받아들고는 빙그레 웃는다. 나도 모르게 지구를 지키는 살림을 살았다는 생각에 뿌듯해 한다. 참고로 오늘 일자 토깽이(나)의 당근 온도는 74.4°. 나의 당근온도가 1° 올라가면 지구 온도는 0.0001°쯤 내려갈 거라는 생각으로 중고 거래를 향한 걸음을 꿋꿋이 이어나간다.
(초고를 쓴 뒤로 여섯 달이 지난 오늘 또깽이님의 당근 온도는 74.8°. 가끔 당근 온도가 99°인 이웃님과 거래를 할 때면 신령한 분을 만난듯 경건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