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주문한 드립커피를 받아들면서 커피 찌끼를 함께 요청했다. 어차피 버려질 무용물이라면 챙겨가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얻은 커피 찌끼를 잔 곁에 두고 한 모금, 또 한 모금 커피를 홀짝이는데 갑자기 맘 속에 떠오른 무엇 하나를 시험하고 싶어졌다.
그즉시 노란 전구가 불을 밝히고 있는 구석진 곳으로 새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축축이 젖은 커피 찌기를 전구 아래 두었다. 과연 생각대로 일까? 마음이 슬쩍 조마해지기까지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구의 열을 흡수한 커피박이 본래 품고 있던 시트러스와 견과류의 조화로운 향을 솔솔 내뿜기 시작했다. 과연 맛과 향이 풍부한 커피라 그것이 남기는 그 부산물마저 향기로웠다.
와글와글 카페를 찾은 이들의 말소리에 음악도 묻히고 받아온 커피도 바닥을 드러낸 시간, 나는 은근히 피어나는 커피 향에 마음을 묻고는 오늘 써야 할 문장을 꿋꿋이 써내려갔다. 그러고도 그것의 잔향이 못내 아쉬워 연필 석 자루를 마저 깎고서야 겨우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매일 집에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커피박을 얻는다. 커피 부산물을 넓게 펼쳐 넌 쟁반을 책장이나 선반 위에 올려두면 찌끼가 고슬고슬 마르도록 좋은 향기가 난다. 그 덕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 마주한 집은 무척 기분 좋은 공간이 된다.
한 번씩 동네 단골 카페에서 커피박을 대량으로 얻어올 때도 있다. 기계로 내린 커피 부산물에서는 탄내가 나는 경우가 많아 베란다창 밖에서 건조한다. 대용량 봉투에 담긴 커피박을 우르르 쏟으면 머신 바스켓에 담겼던 모습 그래도 동그란 커피빵이 간간히 모습을 드러낸다. 모양마저 정겨운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으로 툭툭 건드려 부순다. 착하고 순한 흙같이 보드라운 감촉에 종일 긴장했던 마음이 슬며시 누그러진다.
잘 말린 커피박은 다방면으로 쓰임이 좋다. 생선을 손질한 칼과 나무도마 위에 커피박을 한참 뿌려두면 비린내가 가신다. 기름기 그득한 식기와 프라이팬을 커피박으로 먼저 닦아내면 설거지가 한결 수월하다. 잘 마른 커피박을 다시팩에 담아 신발장, 화장실, 냉장고 등에 넣어두면 소취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커피를 온전히 즐긴다는 건 원두의 부산물인 커피박의 쓰임마저 끝까지 누리는 일이라 확신한다. 본연의 향기로움으로 낭만과 무드를 선사한 원두는 제 몸의 모든 향기를 떨쳐내도록 누군가의 곁에 오래도록 머문다.
고유의 향기를 품은 사람. 그 향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사람. 그것으로 주변과 사람의 마음을 환기시키는 사람. 그렇게 커피박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